앨런 브룩

Alan Francis Brooke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계 아일랜드인 1883–1963 ○ 자연사

제국참모총장으로 연합군 대전략을 세운 영국 육군 원수

그는 1943년 프랑스 상륙이 충분한 병력과 상륙정, 제공권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이 판단은 노르망디 상륙을 1944년 6월까지 늦췄다. 1945년까지 대륙 작전이 불가능하다는 그의 트라이던트 회의 발언은 전략가로서의 명성을 훼손했다.

앨런 브룩은 1883년 7월 23일 프랑스 바녜르드비고르에서 태어나 1963년 6월 17일 심장마비로 사망한 영국 육군의 야전원수다. 그는 포병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해 1929년 라크힐 포병학교 교장을 지냈고 1940년 본토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941년 12월 제국참모총장, 1942년 3월 참모총장위원회 의장에 올라 윈스턴 처칠의 최고 군사고문으로서 연합국의 전략을 조율했고 1944년 1월 1일 원수로 진급했다.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을 몰아내고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이탈시켜 지중해 항로를 여는 전략을 우선했으며, 영국 본토 출생이 아닌 프랑스 출생이지만 국적은 영국이다. 전쟁일기는 처칠과 다른 지휘관들에 대한 직설적 비판으로 유명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생애와 군 경력: 제국참모총장과 연합 전략

어린 시절과 영국계 아일랜드 배경

앨런 프랜시스 브룩은 1883년 7월 23일 프랑스 바녜르드비고르에서 태어났다. 서얼스터 출신의 영국계 아일랜드 가문, 이른바 '콜브룩의 싸우는 브룩' 가문의 사람으로, 아버지는 콜브룩 파크의 제3대 준남작 빅터 브룩 경, 어머니는 앨리스 벨링엄이었다. 어린 시절을 프랑스 포에서 보내 프랑스어와 영어에 모두 능통했고,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출생지가 프랑스라는 사실은 그가 프랑스 국적이었다는 근거가 아니다. 다만 형제 순서에 대해서는 기록이 갈린다. 한쪽은 그를 일곱 번째이자 막내 자녀로, 다른 쪽은 여섯째 아들이자 아홉 번째 자녀로 적는다. 1900년 울리치 왕립군사학교에 간신히 합격했고, 1902년 12월 24일 왕립포병대 소위로 임관해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아일랜드와 인도에서 복무했다.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 중 그는 서부전선의 왕립기마포병대 탄약종대에 배속되어 뛰어난 계획가로 이름을 얻었다. 1916년 솜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융단식 포격'을 도입했고, 1917년 초부터 캐나다 군단과 함께 비미 능선 공격의 포격 계획을 세웠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는 공로훈장과 그 두 번째 훈장을 받은 중령이었다.

제국참모총장과 연합 전략

그는 1941년 12월 제국참모총장, 1942년 3월 참모총장위원회 의장이 되어 영국 육군의 실질적 수장이자 처칠의 최고 군사고문이었다. 지성과 인격으로 참모총장위원회를 주도하며 영국 전략의 군사적 방향을 이끌었고, 1942년에는 미국과 영국의 연합참모총장단에 참여해 1945년 연합국의 승리를 조율했다.

지중해 전략과 대륙 상륙

브룩의 중심축은 지중해 전역이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을 몰아내고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이탈시켜 지중해 항로를 열고, 연합국이 준비되고 독일이 충분히 약화된 뒤에야 대륙 횡단 상륙을 감행한다는 구상이었다. 이는 서유럽 조기 상륙을 주장한 미국 측과 충돌해 연합참모총장단 회의에서 격렬한 논쟁을 낳았고,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의의 시칠리아 상륙 결정은 서유럽 침공을 사실상 1944년으로 미뤘다. 그는 1943년 충분한 병력과 상륙정, 제공권 없이는 프랑스 상륙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그 판단은 노르망디 상륙을 1944년 6월로 늦췄다. 1943년 5월 워싱턴 트라이던트 회의에서 대륙 작전이 1945년까지 불가능하다고 한 발언은 역사가 맥스 헤이스팅스의 평가에 따르면 전략가로서의 명성에 상당한 손상을 입혔다.

사망과 유산

그는 1963년 6월 17일 햄프셔 하틀리윈트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에서 잉글랜드 최고 치안관을 지냈으며, 그의 전쟁일기는 처칠의 정책과 전쟁 지도자들에 대한 직설적 비판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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