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크리모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Крымов

코르닐로프의 페트로그라드 진군을 이끈 제정 러시아 기병 장군

1917년 8월 31일(구력, 신력 9월 13일) 케렌스키 앞에서 권한 이양을 요구받은 크리모프는 함정에 빠졌다고 판단하고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부상한 채 니콜라이 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자살이라는 공식 설명 외에 다른 설명도 전한다.

알렉산드르 크리모프는 제정 러시아군의 기병 장군이다. 바르샤바 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프스코프 생도단과 파블롭스크 군사학교를 거쳐 1902년 니콜라이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졸업했고,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병 부대를 지휘하며 결단력 있는 지휘관으로 명성을 얻었다. 1917년 4월 제3기병군단장이 되었고, 8월 코르닐로프 사건에서 페트로그라드 진군을 이끌었으나 철도 노동자들의 저지와 병사들의 동요로 좌절되었다. 케렌스키와 면담한 뒤 자해했고 니콜라이 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자살이라는 공식 설명 외에 다른 사망 설명도 전하며, 코르닐로프 사건의 성격을 둘러싼 평가도 갈린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군 경력과 코르닐로프 사건

군 경력

1892년 파블롭스크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제6포병여단 소위로 임관했으며 1902년 니콜라이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1등으로 마쳤다. 러일전쟁 중 제4시베리아군단 사령부에서 복무했고, 1911년부터 자바이칼 카자크군 제1아르군 연대를 지휘하다 1913년 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 사무소의 임무 장교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1914년 9월부터 제2쿠반 카자크 사단 여단장, 1915년 3월부터 우수리 기병여단장을 지냈고, 1915년 12월 여단이 사단으로 확대되자 사단장이 되었다. 결단력 있는 기병 지휘관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사단은 1916년 가을 루마니아 전선으로 옮겨졌다.

1917년의 급진화

1917년 2월 이전부터 두마 반대파와 가까웠다. 러시아 프리메이슨 연구자 N. N. 베르베로바는 알렉세예프·루즈스키·크리모프 등 장군들이 구치코프의 도움으로 입문해 그의 음모 계획에 가담했다고 썼으나, 이는 유보를 동반한 그녀의 서술이다. 1917년 1월 페트로그라드로 간 크리모프는 M. V. 로잔코의 회고에 따르면 두마 의원들 앞에서 군대의 쿠데타 지지를 약속했고, 2월 11일 키시뇨프로 돌아왔다. 제3기병군단장 F. A. 켈러가 임시정부에 대한 선서를 거부해 1917년 4월 5일 해임된 뒤, 크리모프가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코르닐로프 사건

1917년 8월 24일 코르닐로프는 크리모프를 별개 페트로그라드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며 수도 내 봉기 진압 임무를 맡겼고, 다음 날 제3기병군단과 투제므나야 사단을 페트로그라드로 보냈다. 부대는 스타프카 지역에서 열차로 이동했다. 크리모프의 진군은 케렌스키와 소비에트가 코르닐로프 진영을 무너뜨리면서 좌절되었고, 기술적 준비의 부실과 코르닐로프를 잘 믿지 않던 대중의 불응적 저항이 작용했으며, 볼셰비키는 철도 노동자들과 함께 진군을 저지했다. 케르스놉스키에 따르면 크리모프는 스타프카의 지시를 받지 못한 채 8월 29일 루가에서 부대를 멈췄다.

평가의 대립

같은 인물에 대한 평가는 갈린다. 데니킨에 따르면 크리모프는 케렌스키와의 타협 가능성을 부정하며 무력으로만 매듭을 끊을 수 있다고 보았고, 자발적으로 코르닐로프 운동의 도구가 되었다. 기병 지휘관으로서는 찬사도 컸고(샤슈카, '러시아의 셋째 칼날'이라는 별칭, A. G. 슈쿠로의 평가), 반면 K. 만네르헤임은 1917년 1월 마구라 진지의 무단 퇴각을 전쟁법의 심각한 위반으로 비판했으며, A. A. 케르스놉스키는 유리한 정세를 살리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사망과 역사적 의의

1917년 8월 30일 케렌스키의 위임을 받은 사마린 대령이 페트로그라드 회담을 제안하자 크리모프는 가기로 했고, 케렌스키 앞에서 권한 이양 제안을 받은 뒤 함정에 빠졌다고 판단해 굴욕적 심문과 체포보다 죽음을 택했다. 공식 설명에 따르면 집무실에서 나온 뒤 가슴을 쏘아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와 함께 케렌스키가 악수 거부로 인한 정신적 동요로 설명하는 견해, 크리모프가 손을 들자 부관에게 사살되었다는 견해, 데니킨의 니콜라이 군병원 사망 서술, 브란겔의 증언이 함께 전한다. 코르닐로프 사건이 치밀한 쿠데타인지, 케렌스키의 조작인지, 권위주의적 협력 시도의 실패인지는 여전히 논쟁적이며, 이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볼셰비키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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