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을 과학으로, 인간을 기계의 리듬으로: 50만 노동자를 훈련시킨 사회공학의 창시자
“사회 분야에서도 정밀한 측정, 공식, 도면, 통제 게이지, 사회적 노르말의 시대가 도래해야 한다. 우리는 정신생리학과 경제학의 완전한 수학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우리의 과제」(1921)
1882년 10월 8일(구력 9월 26일) 블라디미르 주 수즈달에서 교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스크바 교사대학 재학 중 1902년 학생 시위를 주도한 일로 제적된 뒤 직업혁명가가 되었고, 1905년 코스트로마 소비에트 의장을 맡았다. 프랑스에서 금속노동자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앙노동연구소(CIT)를 창설해 '사회공학'과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NOT)를 정립했고, 1932~1936년 전연방표준화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38년 9월 반혁명 테러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되어 1939년 4월 15일 코무나르카에서 총살되었고, 1956년 3월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학술·연구
- 1931– 사회운동·조직 · 소련공산당·볼셰비키
경력 연표
- 1901RSDLP 입당
- 1905코스트로마 소비에트 의장
- 1906RSDLP 제4차 대회 대의원
- 1917–1918전러시아금속노동자동맹 중앙위 서기
- 1920–1938중앙노동연구소(CIT) 창설·소장
- 1931VKP(b) 재입당
- 1932–1936전연방표준화위원회 의장
관련 역사 사건
프롤레트쿨트 시인: 기계 시대의 음유시인
가스테프는 소비에트 노동과학의 아버지이기 전에, 프롤레트쿨트 최초의 시인이었다. 1918년 프롤레트쿨트가 처음 출판한 책은 바로 그의 시집 『노동타격의 시』였다. 1926년까지 여섯 번 재판될 만큼 당대 노동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이 작품은 전통적인 시의 운율과 각운을 벗어던지고, 공장의 굉음과 강철의 리듬을 언어로 번역한 산문시였다.
그의 시는 개인의 서정이 아니라 집단적 노동의 신체성을 노래했다. 벨기에 상징주의자 베르하렌과 휘트먼의 민주주의적 송가에서 영향받은 가스테프의 시적 언어는 "기계의 시학"이라 불릴 만했다. "탑들아, 어깨를 펴라 / 철근을 들어올려라 / 기중기, 천장을 찔러라". 그의 시에서 공장은 살아있는 유기체이고, 노동자는 그 거대한 신체의 일부가 된다. 이는 CIT에서 그가 훈련시킨 '인간-기계'의 이상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1916년 시베리아 유배 중 쓴 환상소설 『특급열차: 시베리아 환상』은 북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베링 해협까지 달리는 미래 여행기로, 압축종이로 지은 야쿠츠크, 거대 수족관 도시 오호츠크, 화산열을 이용하는 캄차카, 그리고 천 개의 굴뚝에서 유독가스 대신 청정가스만 내뿜는 '강철의 도시' 노보시비르스크를 그렸다. 이 유토피아는 1920년대 소비에트 산업화의 상상적 청사진이었다.
마야콥스키는 "가스테프와 케르젠체프는 어디 있느냐"라고 노래했고, 니콜라이 아세예프는 그에게 헌정시를 바치며 "나는 그 누구보다도 그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가스테프"라고 썼다. 1920년 이후 가스테프는 문학을 버리고 전적으로 노동과학에 헌신했지만, 그의 CIT 연구소는 스스로 "나의 마지막 예술작품"이라 부른 대상이었다. 문학과 사회공학은 그에게서 분리되지 않는다.
중앙노동연구소와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
1921년 가스테프는 중앙노동연구소(CIT)를 창설해 상임 소장이 되었고, 이 기관은 소비에트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NOT) 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영문 자료는 레닌의 지원 아래 1920년에 세워졌다고 적고, 러시아어 자료는 그가 1921년부터 이끌었다고 적어 창설 연도에는 차이가 있다. 가스테프는 CIT를 "나의 마지막 예술작품"이라 불렀다. 연구소는 끌로 재료를 자르는 것 같은 단순 반복 작업을 정밀하게 분석해 더 효율적인 방법을 만들어냈고, 연수생들은 해머 기계에 팔을 묶인 채 30분 훈련으로 기계적 리듬을 몸에 새겼다. 가스테프 스스로 노동자를 '인간 로봇'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인정했다.
1921년 「우리의 과제」에서 그는 사회주의 경제에서 노동을 과학적으로 조직하는 '사회공학' 강령을 제시했다. 결정적 요인은 새 유형의 노동자가 편입되는 기술 및 기술공정의 논리이며, 대량생산은 모든 기계를 연구실로 바꾸고, 작업문화는 기계 작업의 방법론, 즉 분석성과 대량 수량의 회계, 표준화로 규정된다는 것이었다. 사회공학은 생리학·심리학에 기초한 생산공정의 과학적 조직화와 사회심리학에 기초한 관리의 과학적 조직화라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그는 시스템과 조직을 강조한 테일러, 생산기술에 집중한 포드(가스테프는 포드와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았다)와 달리 인간적 요소를 강조해, 조직의 효율성은 작업장에서의 개인의 효율성, 특히 시간의 효율적 사용에서 시작한다고 보았다. 『어떻게 일할 것인가』는 대다수 소비에트 시민에게 노동문화가 결여되어 있으며 그것을 심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CIT는 대규모 훈련 기구로 성장했다. 소련 측 수치로는 1921~1938년 약 1,700개 훈련소에서 200여 직종에 걸쳐 50만 명 이상의 숙련 노동자를 배출했고, 1930년 초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에만 8천 명 이상을 훈련시켰으며, 400여 개 기업과 건설 현장에 인력을 공급했다. 교관·관리자도 2만 명 이상 양성되었고 실무 활동은 1930~1934년에 정점에 달했다. 1928년 가스테프는 재정 확충을 위해 주식회사 '우스타노프카'(설치)를 세워 기업을 감사하고 효율적 노동조직 권고안을 상업적으로 판매했으며, 3~6개월 집중 과정으로 숙련 노동자를 길러냈다. FZU 공장학교식의 장기 직업교육에 반대해 청년의 사회적 보호를 외면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1921년 케르젠체프는 노동자 개인에 집중하는 가스테프의 테일러주의적 '협소한 기반'을 비판했고, 1924년 전러시아 과학적 관리 회의는 가스테프의 손을 들어주는 대신 케르젠체프는 CIT가 3년을 허비했다고 주장했다. 가스테프는 CIT 소장 자격으로 SOVNOT 상임 부의장을 지냈고 1926년에는 SOVNOT 의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 CIT 5주년을 맞아 노동적기훈장을 받았다. 1931년에는 비판 세력으로부터 CIT를 지키려는 목적에서 후보 기간 없이 중앙위원회 결정으로 VKP(b)에 입당했고, 1932~1936년 노동국방평의회 산하 전연방표준화위원회 의장과 『표준화 통보』 편집장을 맡았으며 1935년에는 스톡홀름 국제표준화회의 소련 대표단을 이끌었다.
1930년대 후반 CIT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응용 노동과학은 관념론과 방법론적 중립성 혐의로 '부르주아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산업 심리기술학과 노동 정신생리학 실험실은 폐쇄되었으며 CIT와 지방 노동연구소의 활동은 대폭 축소되었다. 1938년 9월 가스테프는 NKVD에 체포되었다(체포일은 자료에 따라 9월 7일 또는 9월 8일로 엇갈린다). 1939년 4월 14일 소련 대법원 군사재판부는 반혁명 테러조직 가담 혐의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다음 날 코무나르카에서 총살되었다. 변호인도 없고 상소도 불가능한 재판이었다는 점이 대숙청기의 일반적 관행으로 지적된다. 1956년 3월 같은 재판부가 그를 복권시켰다.
탄압은 가족에게도 미쳤다. 집행 직후 두 번째 아내 소피야 아브라모브나 그린블라트(바르샤바 출신, 『프라우다』 편집부 근무)는 '조국 반역자의 가족'으로 5년형을 선고받아 포티마 수용소에서 복역했고, 아들 표트르(1921~1943)는 쿠르크에서 전사했으며 유리(1928~1993)는 스탈린 시기 정치범이었다가 후일 수학자·반체제 인사로 미국으로 이주했다. 한 자료에 따르면 아들 알렉세이와 블라디미르, 첫 번째 아내도 체포되었다. 소련에서 그의 유산은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1950년대 중반에 시인으로서만 '기억'되었으며,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의 선구자로서의 의의는 1980년대에야 인정되었다. 그의 사상은 나중에 린 생산으로 불린 체계의 바탕이 되었고, 1930년대부터 일본의 연구기관이 CIT의 관행을 연구해 받아들였다. 수즈달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고, 2011년부터 러시아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린 생산 지도자 대회가 열린다. 1940년 말 CIT는 항공산업 인민위원회로 이관되었고, 그 후신은 국립항공기술연구소(NIAT)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