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기의 이름이 된 사나이: 탐보프 '안토놉시나'의 사회혁명당 지도자
「권력은 차르의 사형집행인들 손에서 빼앗아, 공산당 사형집행인들 패거리에게 넘기라고 빼앗은 게 아니다」 — 봉기 중 배포한 전단에서
차르 치하에서 20년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복역한 사회혁명당 전투원.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된 후 키르사노프 현 민병대장을 지냈으나, 볼셰비키의 식량강제징발과 지방 통치에 반발하여 1918년 지하로 잠적했다. 1920년 8월 탐보프 농민봉기를 장악해 약 20개 연대 규모의 유격군을 조직하고 '노동농민동맹'을 바탕으로 한 대안정부를 수립했으며, 봉기는 그의 이름을 따 '안토놉시나'로 불렸다. 1922년 6월 GPU 부대에 포위되어 동생 드미트리와 함께 총격전 끝에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05사회혁명당 입당, 무장 강탈(엑스) 참여
- 1908인자비노 역 급습 및 다수의 무장 강탈
- 1909체포, 사형 선고 후 무기징역 감형 — 슐리셀부르크·블라디미르 중앙형무소
- 1917사면 석방 — 탐보프 시 민병대 부책임자 → 키르사노프 현 민병대장
- 1918–1920지하로 잠적, 볼셰비키 당국에 맞서 전투부대 편성
- 1920–1921탐보프 봉기 주작전참모장 — 2개 군, 약 20개 연대 지휘
- 1921–1922봉기 패배 후 은신; GPU에 포위되어 사살
관련 역사 사건
안토놉시나: 탐보프 봉기의 원인·강령·진압
1920년 8월 탐보프 현에서 시작된 봉기는 안토노프의 이름을 따 '안토놉시나'로 불리게 되었다. 직접적 계기는 볼셰비키의 곡물강제징발(프로드라즈베르스트카)이었다. 그해 가뭄으로 수확은 1200만 푸드에 그쳤는데 징발 할당은 1150만 푸드에 달했고, 식량분견대가 이를 무력으로 거둬들이며 마을을 굶주림으로 몰았다. 1918년 12월 안토노프가 편성해 둔 전투분견대가 지역 '녹색' 유격대와 합류하면서 봉기는 전 현으로 번졌고, 1920년 11월에는 통합유격군과 주작전참모부가 수립되어 안토노프가 그 참모장을 맡았다. 봉기의 정치조직은 사회혁명당원 이반 이신이 이념을 주도한 '노동농민동맹'(STK)이었다. 그 강령은 볼셰비키 독재의 타도, 제헌의회 소집, 토지 사회화의 완전한 실시, 정치적 평등, 협동조합을 통한 식량 공급, 공장의 부분적 탈국유화를 내걸었다. 1921년 초 봉기군은 약 5만 명으로 성장해 세 개 군 산하 약 20여 개 연대를 거느리고 탐보프 현 대부분을 장악했다. 진압은 1921년 4월 투하쳅스키에게 맡겨졌다. 그는 인질과 그 가족의 처형을 규정한 명령 171호와, 유격대가 숨은 숲에 독가스를 쓰라는 명령 0116호를 내렸고 수용소 건설과 마을 소각이 뒤따랐다. 1921년 여름 봉기는 진압되었고 총 인구 감소는 연구자 추산 약 24만 명에 이른다. 크론슈타트 봉기와 함께 이 사건은 볼셰비키가 전시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신경제정책으로 전환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