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오시포비치 베르크만

Александр Осипович Беркман
아나키스트 러시아 러시아 1870–1936 ✕ 자살

프릭 암살 미수로 14년 복역하고 소비에트를 떠난 아나키스트 작가

시카고 환송연에서 헨리 클레이 프릭의 사망 소식을 듣고 베르크만은 이렇게 말했다: '프릭은 신에 의해 추방되었다.'

러시아 제국 빌나에서 태어나 1888년 미국으로 이주한 아나키스트 혁명가이자 작가. 1892년 홈스테드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에 분노하여 제철소 사장 헨리 클레이 프릭을 암살하려다 실패, 14년간 복역했으며 그 경험을 《한 아나키스트의 옥중기》(1912)에 담았다. 출소 후 에마 골드만의 잡지 《마더 어스》 편집자로 활동하며 미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1919년 반전 활동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처음에는 볼셰비키 혁명에 열광했으나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을 목격하고 환멸을 느껴 《볼셰비키 신화》(1925)에서 초기 소비에트 국가의 권위주의를 기록했으며, 이후 프랑스 망명 중 아나코-코뮤니즘 입문서 《지금 그리고 이후에》(1929)를 저술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크론시타트 반란과 중재 시도

1921년 2월 페트로그라드의 식량·연료난 속에 트루보치니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했다. 겨울옷 배분에서 공산당원이 비당원보다 우대를 받았다는 불만이 있었고, 당국은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를 복귀 전까지 논의하지 않겠다고 했다. 노동자들은 체포된 사회주의자와 비당원 노동자의 석방, 계엄령 철회, 노동자와 농민의 언론·집회 자유,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 대표의 자유선거를 요구했다. 베르크만의 일기는 당시 페트로그라드의 현장 관찰과 동시기 기록을 엮은 것으로, 그는 사건과 정파들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함께 서술했다.

3월 1일 크론시타트에서 열린 발트 함대 제1·2전대 집회에는 선원·적군 병사·노동자 약 1만 6천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지지를 밝히면서 볼셰비키 관료제를 비판했고, 비밀투표에 의한 새 소비에트 선거, 노동자·농민·아나키스트·좌파 사회주의자의 언론 자유, 정치범 석방과 배급 평준화 등을 결의했다. 베르크만은 그 결의가 압도적 다수로 채택되었다고 기록한다. 당 지도부는 이를 백위군 음모의 증거라고 규정했고, 트로츠키는 무장해제를 요구하며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겠다고 경고했다.

베르크만은 엠마 골드만 등과 함께 무력충돌을 막으려 했다. 3월 5일 지노비예프에게 보낸 제안서에서 그는 노동자와 선원들의 불만을 대화와 합의로 다루자고 촉구하고, 아나키스트 두 명을 포함한 5인 중재위원회를 크론시타트에 보내자고 제안했다. 그는 백위군이 불만을 이용할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정부가 노동자와 선원에게 무력을 쓰면 혁명운동에 해를 끼친다고 주장했다.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베르크만은 3월 7일 포격 소리를 들었다고 적었고, 3월 17일 크론시타트 함락과 사망자 및 포로·인질에 대한 즉결처형이 이어졌다고 기록했다. 그의 일기는 크론시타트 전투를 직접 목격한 기록은 아니며, 당시 페트로그라드에서 사건을 보고 들은 관찰자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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