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에서 IWA까지 국제 아니코생디칼리슴을 엮은 배후의 조직가
1921년 2월, 크로폿킨의 장례 행렬 뒤로 2만 명의 아나키스트가 모스크바 거리를 메웠다. 샤피로와 베르크만이 장례위원회를 조직했다. 소련에서 허용된 마지막 아나키스트 시위였다.
국제 아나코생디칼리즘의 핵심 연결자.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서기로서 대륙 간 네트워크를 조직했고, 혁명기 볼셰비키 정부에서 일하면서도 아나키스트 비판을 견지했다. 추방 후 베를린에서 IWA 창립을 주도했다.
경력 연표
- 1901–1907런던 유대인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활동, 『아르베테르 프라인트』 그룹 회원, 주빌리 스트리트 클럽 주재
- 1907암스테르담 국제아나키스트대회 대표; 국제사무국 서기 및 『Bulletin de l'Internationale Anarchiste』 편집
- 1915『국제아나키스트 반전 선언』 서명; 크로폿킨의 연합국 지지와 결별
- 1917–1920귀국 후 『골로스 트루다』 편집진; 유대인인민위원부 및 외무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21크로폿킨 장례 조직; 『러시아 혁명과 공산당』 공동 집필; RILU 대회 중 정치범 석방 협상
- 1922모스크바에서 체포, 국제적 항의로 석방된 후 소련에서 영구 추방
- 1922–1932베를린에서 IWA 창립 주도, 사무국 서기; 『라보치 푸티』로 러시아 내 비밀 유통
- 1932–1939바르셀로나에서 CNT-FAI 갈등 중재; 프랑스에서 『라 부아 뒤 트라바이』 편집; 1939년 뉴욕 이주
- 1945–1946뉴욕에서 『뉴 트렌즈』 편집, 심장마비로 사망
국제 생디칼리즘의 숨은 설계자
샤피로는 대중 연설가나 저술가로서가 아니라, 국제 네트워크를 짜는 탁월한 조직가로서 아나코생디칼리즘의 역사적 진로를 결정지었다. 1907년 암스테르담 국제아나키스트대회에서 루돌프 로커, 에리코 말라테스타와 함께 국제사무국 서기로 선출된 그는 『Bulletin de l'Internationale Anarchiste』를 프랑스어로 발간하며 각국 생디칼리스트들 사이의 소통 채널을 구축했다. 이 회보는 약 1년간 거의 매달 발행되며 국제 운동의 정보 인프라 역할을 했으나, 아나키스트 운동 내 조직화 공포 때문에 점차 쇠퇴했다.
1913년 런던 제1차 국제생디칼리스트대회에서는 통역을 맡았고, 1914년 8월로 예정된 제2차 아나키스트대회 준비에 전념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무산되었다. 전쟁 기간 크로폿킨의 연합국 지지 노선에 반대하며 반전 선언에 서명했고, 1922년 베를린에서 국제노동자협회(IWA) 창립을 주도하여 러시아 생디칼리스트 운동을 대표했다. 소비에트 체험을 통해 그는 볼셰비즘과의 결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고, IWA 사무국 서기로서 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독일·이탈리아·스웨덴·스페인·포르투갈·프랑스·아르헨티나·멕시코 등지로 확장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샤피로에게 IWA는 볼셰비즘과 개혁주의 양쪽에 대한 대응일 뿐 아니라, 전쟁 전부터 이어져 온 국제 생디칼리스트 통합 작업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