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게뒤시 언드라시

Hegedüs András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인 1922–1999 ○ 자연사

혁명의 문턱에서 책임을 짊어진 젊은 총리

그는 훗날 총리직 수락을 두고 “나쁜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헤게뒤시 언드라시는 헝가리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사회학자로, 라코시 체제의 충실한 간부에서 체제 비판적 연구자로 이동했다. 라코시와 게뢰의 후원으로 총리가 되었지만, 1956년 혁명 때 소련군 개입 요청서에 서명하며 마비된 지도부의 정치적 책임을 떠안았다. 모스크바로 피신했다가 귀국한 뒤 사회학 연구를 이끌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한 뒤 당에서 축출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53년 6월, 크렘린에 불려 간 서른 살의 농업장관

1953년 6월 12일 헝가리 대표단 8명이 퇴쾰 군 비행장에서 특별기로 모스크바로 떠났을 때, 헤게뒤시 언드라시는 농업장관으로 그 안에 있었다. 초청 명단은 소련 당 간부회가 직접 골랐다. 히더시 이슈트반, 설러이 벨러, 푈드바리 루돌프와 함께 그는 1952년 지도부에 들어온 30대 초반의 간부였다. 지하활동 경력도 망명 경험도 없었고 유대계도 아니었다. 소련 지도부는 이들을 「승진시킬 만한」 젊은 간부로 보았다. 헤게뒤시는 당 서기국원이어서 6월 3일 회의에서 이미 소련이 헝가리 상황에 불만이라는 것을 알았겠지만, 대표단 대부분은 무엇 때문에 불려 가는지 몰랐다.

크렘린 회담에서 헤게뒤시는 말렌코프가 권력 서열의 맨 위에 있었지만 흐루쇼프의 야심 또한 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6월 14일 숙소 회의에서 그와 히더시는 라코시와 대등한 지위라고 느껴 본 적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훗날 그는 회고에서, 당시 모두가 말렌코프를 소련 지도부의 최고 인물로 여겼기 때문에 총리직을 제1서기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적었다. 회의실을 나설 때 너지가 라코시에게 먼저 가라고 양보하자, 라코시가 「가게, 임레, 이제 자네가 지도자야!」 하며 너지를 앞으로 떠밀었다는 장면도 그의 회고에 남아 있다. 그는 베리야가 라코시를 두고, 협조하지 않으면 「허리를 부러뜨리겠다」고 말했다고도 기억했다.

6월 말 새 정치위원회가 꾸려지자 헤게뒤시는 정위원이 되었고, 게뢰와 함께 너지 정부의 부총리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라이너가 지적하듯 새 정치위원회는 주로 라코시와 게뢰가 1951~53년에 발탁한 젊은 간부들로 채워졌고, 헤게뒤시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너지의 사람이 아니라 라코시 쪽의 신세대였고, 1955년 4월 라코시가 너지를 밀어냈을 때 후임 총리가 된 것도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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