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헌장을 공동 기초한 소련 외교관, 냉전기 유엔의 소련 얼굴
알제 히스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소볼레프와 파스볼스키에 대해 “그들이야말로 헌장의 형태를 만든 진짜 책임자들이었다”고 증언했다.
국제법 전문가로서,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미국 측 리오 파스볼스키와 함께 유엔헌장의 구체적 문안을 책임진 공동 기초자였다. 전후 유엔 사무차장(안전보장·정치 담당)으로 국제기구의 제도화에 참여했고,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소련의 유엔 상임대표로서 헝가리 봉기 직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 냉전기 소련 외교의 최전선에 섰다. 이후 생애 마지막까지 외무차관으로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실무를 지휘했다.
경력 연표
- 1939–1942외무인민위원부 사무총장
- 1942–1945주영 소련대사관 참사관
- 1945–1946소련군정청(독일) 정치국장
- 1946–1949유엔 사무차장(안전보장·정치 담당)
- 1949–1950소련 외무부 유엔국장
- 1950–1951소련 외무부 미국국장
- 1951–1953주폴란드 소련 대사
- 1953–1954소련 외무부 미주국장
- 1954–1955소련 유엔 차석대표
- 1955–1960소련 유엔 상임대표 겸 안전보장이사회 대표
- 1960–1964소련 외무차관
관련 역사 사건
소볼레프 작전 — 1940년 불가리아 공세
1940년 11월 24일, 당시 외무인민위원부 사무총장이었던 소볼레프는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도착해 보리스 3세에게 12개 조항으로 된 소련 정부의 공식 제안을 전달했다. 소련은 불가리아의 영토적 요구(서트라키아·동트라키아)를 지지하고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으며, 그 대가로 흑해와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 해협 지역에서 소련의 안전이 위협받을 경우 불가리아의 협력을 요구했다. 이는 부르가스에 소련 해군기지를 설치하려는 구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불가리아의 보그단 필로프 총리와 보리스 3세는 발트 3국 병합의 전례를 들어 이 제안을 신뢰하지 않았고, 사흘 만에 정중하지만 단호한 거절로 응답했다. 같은 날 스탈린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를 크렘린으로 불러 "불가리아인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완전히 독일과 이탈리아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라며 광범위한 대중 캠페인을 지시했다. 디미트로프의 지령을 받은 불가리아 노동자당(공산주의자)은 전국적인 서명 운동을 전개했고, 수일 만에 34만 명 이상의 서명이 수집되어 의회와 궁정으로 쇄도했다. 시인 니콜라 밥차로프는 자신의 대표작 「농민 연대기」에서 이 운동을 노래했다가 체포되어 강제 추방당했다.
그러나 대중 운동의 규모는 역설적으로 불가리아 정부를 경계하게 만들었고, 소련의 내정 간섭이라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스탈린은 캠페인이 노골적이었다고 판단해 모든 책임을 디미트로프에게 전가했다. 1941년 3월 1일 불가리아는 결국 삼국 동맹에 가입했으며, 이는 소련의 외교적 실패로 귀결되었다. 소볼레프 작전은 나치-소련 불가침 조약 체제 하에서 소련이 발칸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려 한 대표적 시도로, 이후 소련 지도부가 불가리아 내 공산주의 세력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게 만든 사건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