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네사 표도로브나 아르만트

Инесса Фёдоровна Арманд
소련 프랑스 1874–1920 ○ 자연사

레닌과 가장 가까웠던 여성 볼셰비키: 죽음이 그녀를 숙청에서 구했다

1914년 레닌은 그녀를 브뤼셀 국제사회주의사무국 회의에 단독 대표로 파견하며 편지했다: "그대는 혼자 책임을 질 때 더 성장하고 강해지며 대담해지는 사람이다."

레닌의 절친한 동지였던 프랑스 태생 볼셰비키 혁명가. 1919년 제노트델(당 여성부) 초대 책임자로서 여성 해방 정책의 틀을 세우고, 1920년 제1차 국제공산주의여성회의를 주재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11년, 롱쥐모 당 학교의 교사

이네사 아르만트는 파리에서 태어나 모스크바의 부유한 아르만트 집안에서 자랐고, 그 집안의 아들과 결혼해 다섯 아이를 두었다. 자선 사업의 한계를 깨달은 그는 1904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직업 혁명가가 되었고, 체포와 북부 메젠 유형, 탈출을 차례로 겪었다.

1911년 여름 파리 근교 롱쥐모에서 볼셰비키 최초의 당 학교가 열렸을 때, 아르만트는 학교의 살림을 꾸리는 동시에 정치경제학을 강의한 핵심 교사였다. 러시아의 공장에서 온 노동자 학생들은 낮에는 강의를 듣고 밤에는 토론했다. 다섯 개 언어를 구사한 그는 레닌이 가장 신뢰하는 특사가 되어 1914년 브뤼셀 통합 회의에 볼셰비키 대표로 파견되었고, 전쟁이 터지자 1915년 베른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에 볼셰비키 대표단을 이끌고 참가해 반전 좌파의 결집에 나섰다.

제노트델의 초대 책임자, 1920년 9월

1917년 4월 아르만트는 레닌, 크룹스카야와 같은 봉인 열차로 귀국해 모스크바에서 혁명을 맞았다. 1918년 11월 콜론타이, 스베르들로프와 함께 제1차 전러시아 여성노동자대회를 조직했고, 1919년 9월 당 중앙위원회에 여성부(제노트델)가 창설되자 초대 책임자가 되었다. 대의원 회의 제도를 통해 평범한 여성 노동자와 농민 들을 소비에트 행정으로 끌어들이고, 탁아소와 공동 식당, 문맹 퇴치 강습을 조직하는 것이 제노트델의 일상 사업이었다. 그는 잡지 『코무니스트카』를 편집했고 1920년 여름 제1차 국제공산주의여성회의를 주재했다.

과로로 쇠약해진 그에게 레닌은 캅카스에서 요양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내전의 혼란 속에 요양지를 전전하던 아르만트는 날치크에서 콜레라에 감염되어 1920년 9월 24일 마흔여섯의 나이로 숨졌다. 유해는 모스크바로 옮겨져 크렘린 벽 아래 안장되었고, 장례식에서 레닌이 보인 비통함은 여러 목격자의 기록에 남아 있다. 그가 세운 제노트델은 이후 10년간 소비에트 여성 해방 정책의 엔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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