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라이 벨러

Király Béla
헝가리 반혁명 세력 헝가리 헝가리인 1912–2009 ○ 자연사

1956년의 장군이자 논쟁적 증언자

“나는 5년의 투옥에서 뼈와 가죽만 남은 채 나왔다.”

키라이 벨러는 헝가리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거쳐 1956년 혁명에 참여했다. 전후 체제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석방된 그는 국민위병을 지휘하며 소련군에 맞선 헝가리 무장세력의 최고위 군인이 되었다. 망명 뒤 미국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티토·스탈린 결렬을 다룬 회고와 저술에서 소련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계획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공개된 소련권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는 그 주장을 반박하거나 수정하며, 그의 증언을 1956년의 경험과 기억 정치 속에서 다시 검토하게 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야드 바셈 "열방의 의인" 서훈과 그 근거를 둘러싼 논쟁

키라이가 1993년 야드 바셈의 인정을 받게 된 배경에는 전시 유대인 강제노동자들에 대한 그의 처신이 있다. 1941~1943년 약 5만 명의 헝가리 유대인 남성이 군사 노동복무대에 징집되어 헝가리군과 함께 동부 전선으로 보내졌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거나 헝가리 부대에 의해 살해되어 수천 명만이 돌아왔다. 유대인 노동복무대가 배속된 제201사단의 보급 책임 장교였던 키라이는 이들에게 남루한 사복 대신 새 방한 군복을 지급하도록 하고 군모와 신발을 나눠 주었으며, 식량 배급과 숙영지를 정규 병사와 동일하게 맞추었다. 이들은 헝가리군 병사와 구별되지 않게 되어 독일군 병사들의 박해를 피할 수 있었고, 독일군은 유대인이 군복을 입는다고 불만을 제기했다. 부대 출신 유대인들은 훗날 그의 조치가 목숨을 구했다고 증언했으며, 언도르 발린트는 그가 "우리가 인간성을 붙들 수 있게 했고 육체적·정신적 생존을 가능하게 했다"고 회고했다. 야드 바셈은 그가 유대인에게 군복을 지급해 법을 어겼다고 기록하면서, 자신의 지위와 권한으로 노동복무대의 조건을 개선한 공로를 인정했다. 헝가리어 위키백과 전기도 그가 사단 소속 유대인 노동복무자들에 대해 보인 인간적 처신으로 1993년 "세계의 의인"에 선정되었다고 적고 있다.

서훈 시점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야드 바셈 기록은 1993년 3월 11일로 적고, 뒤의 학술 논문은 1993년 5월에 서훈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야드 바셈의 '의인' 서훈으로 이어진 키라이 벨러의 허풍"이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그 인정이 노동복무대 재향자들의 허위 증언에 근거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1944~1945년 겨울, 화살십자당 국방부의 고위 관리로서 쾨세그에 있던 키라이가 유대인 노동복무자 5천 명의 고통에 대응하지 않아 2천 5백 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 논쟁은 그의 전기 전반의 쟁점과 이어진다. 그의 생애 여러 국면의 주요 사료는 본인의 회고이며, 비판자들은 그것이 자신의 역할을 미화하거나 사실과 다르게 그렸다고 본다. 화살십자당의 살러시 시기 활동, 1945년 쾨세그를 소련군에 넘긴 일, 1945~1951년 군 장교 복무, 1956년 혁명에서의 행적 등이 그 대상이다. 2008년 키라이-보코르 소송에서 키라이는 살러시에게서 군사 훈장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호르티 시기에 지휘관의 승인 아래 수행한 군사 행동에 대한 것이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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