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보

薄一波

초대 재정부장이자 「61인 반도 사건」의 당사자, 개혁기에 보수적 원로로 돌아온 인물

1940년 8월 26일 팽덕회와 좌권이 이 작전을 「백단대전」으로 명명했으나, 그 개전은 뒤에 모택동과의 노선 갈등 속에 팽덕회를 겨눈 죄목으로 되살아났다.

산시 출신으로 1936년 당의 지시로 국민당 감옥에서 「전향서」에 서명하고 출옥한 61명 중 한 사람이었고, 이 일은 문화대혁명에서 「61인 반도 집단」 사건으로 되살아나 그를 12년 감금으로 몰았다. 건국 후 초대 재정부장으로 세제와 통화 통일을 맡았고 1953년 「신세제」 논란으로 마오의 비판을 받았다. 1979년 복귀해 부총리와 중앙고문위원회 부주임으로 「팔대 원로」의 한 사람이 되어 1987년 후야오방 해임 회의를 주재했다. 2007년 98세로 사망했으며 아들이 보시라이다.

다른 이름: 박일파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산시 통일전선과 항일전 지휘

1936년 말 감옥에서 나온 보이보는 고향 산시로 돌아가, 일본의 침략을 두려워한 산시의 군벌 옌시산과 공산당의 통일전선 아래에서 활동했다. 옌시산은 보이보의 옛 동창인 궈잉이를 베이징으로 보내 그를 설득했고, 보이보는 당의 묵인 아래 반공 전향서에 서명하고 출옥해 1936년 10월 산시로 돌아갔다. 옌시산은 그에게 애국희생동맹을 맡겼고, 보이보는 이 조직을 공산주의 확산의 전선으로 활용하면서 젊은 지원자들로 결사대를 조직했으며, 옌시산과의 관계를 이용해 그가 감금하고 있던 공산당원들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1937년 일본군이 산시 북부를 점령하고 옌시산 군대의 90퍼센트를 궤멸시키자, 보이보는 자기 부대의 생존자들을 모아 산시 남부에서 항일 유격전을 벌였다. 옌시산과 공산당의 협력이 1939년에 끝나자 그는 자기에게 충성하는 부대원들을 이끌고 팔로군에 합류했다. 이후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팔로군에서 사령관 겸 정치위원으로 산시, 허베이, 산둥, 허난에서 항일전을 지휘했고, 이 지역들에 대한 행정적 권한을 인정받는 여러 당직을 맡았다. 이 시기 동안 그의 위신과 영향력은 커져 갔으며, 국공내전 후반인 1946년에서 1949년 사이에는 류사오치와 녜룽전의 지도 아래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