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루스 봉건제론을 정립한 소비에트 중세사의 창시자
1939년, 그레코프는 키예프 루스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세 민족의 공동 요람"으로 규정하며 소비에트 중세사학의 근간을 세웠다.
소비에트 중세사학의 창시자. ≪키예프 루스≫(1939)에서 키예프 루스를 봉건 국가로 규정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공동 요람으로 정립했다. 1936년부터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장을 지냈다.
경력 연표
- 1901–1907바르샤바대학에서 페트루셰프스키 사사 후 모스크바대학으로 편입, 류뱝스키 지도 아래 졸업
- 1910–1916페테르부르크 김나지움 교사, 셰레메테프 가문 도서관장; 플라토노프 지도로 석사논문 방어(1914) 후 페트로그라드대학 사강사
- 1916–1921페름대학 러시아사 강좌 개설 및 초대 주임(1916–1918); 내전기 타브리다대학 교수 겸 타브리다 학술기록위원회 부위원장
- 1930'아카데미 사건'으로 체포, 약 한 달 구금 후 톰신스키의 신원보증으로 석방
- 1934–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1934), 정회원(1935); ≪키예프 루스≫(1939) 출간 — 봉건제론 정립
- 1936–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소장; 역사·철학부 아카데미 서기(1946–1953) 겸임
- 1943–1952스탈린상 3회(1943, 1948, 1952), 레닌훈장 2회(1944, 1952); 물질문화사연구소장(1943–1947)·슬라브학연구소장(1947–1951) 겸임
- 1947–1953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1947–1950) 및 소련 최고소비에트(1950–1953) 대의원; 1953년 9월 모스크바에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아카데미 사건」 — 체포, 취약성, 그리고 체제와의 타협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이어진 「아카데미 사건」에서 OGPU는 세르게이 플라토노프, 마트베이 류뱝스키, 예브게니 타를레 등 소비에트 역사학계의 원로들을 대거 체포·추방했다. 이 수사망에 걸려든 그레코프는 1930년 체포되어 약 한 달 3일간 구금되었다. 직접적인 혐의는 내전기 크림에 체류하던 1918~1920년에 브랑겔 백군에서 복무했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 그레코프는 군 복무 경력이 전혀 없었다. 다만 그는 브랑겔이 크림에 진입했을 때 타브리다대학 교수진 사이에서 그를 환영하는 편에 섰고, 이 사실이 1930년대에 널리 알려지면서 정치적 약점이 되었다. 그레코프는 당시 근무하던 역사·고고학연구소 소장 세르게이 톰신스키의 신원 보증으로 석방되어 플라토노프 등 선배들의 비극적 운명을 면했다. 그러나 이 경험은 깊은 상흔을 남겼다. 우크라이나 역사학자 안드리 플라호닌에 따르면, 이후 그레코프는 스탈린 시기 숙청의 압력 속에서 체제가 주문하는 지식을 생산하는 쪽으로 대폭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리 크리보셰예프는 2016년 논문에서 그레코프의 수사 기록을 처음 공개하며, 이 체포가 소비에트 역사과학의 수장으로 부상한 그의 이후 궤적에 드리운 모순, 즉 광범위한 박식과 전문성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전연방공산당사 단기강좌』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 맞추어야 했던 긴장의 출발점이었다고 분석했다. 중세사학자 블라디미르 코브린은 그레코프 저작에서 넓은 박식과 높은 전문 문화가 결론의 도식주의와 결합된 모순을 지적했고, A. A. 셴니코프는 그레코프가 스탈린기와 사후 10여 년간 소비에트 역사과학의 아버지로 거의 공식 선언되어 그의 견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고 평했다. 체포와 석방,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이념적 순응. 이 긴장은 그레코프라는 인물과 그가 세운 소비에트 중세사학 전체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드라마다.
『황금 군단과 그 몰락』 — 몽골-타타르 지배기 연구
그레코프는 키예프 루스 연구와 병행하여 몽골-타타르 지배기의 동슬라브 사회를 체계적으로 규명했다. 알렉산드르 야쿠봅스키와 공동 집필한 『황금 군단』(1937)은 이 분야의 선구적 저작으로, 1950년 『황금 군단과 그 몰락』이라는 제목의 개정판으로 출간되어 오늘날까지도 재간행되는 고전이 되었다. 이 책에서 그레코프는 몽골의 지배가 루스의 봉건적 발전을 지체시켰지만 단절시키지는 않았으며, 루스 사회 내부의 경제적·계급적 모순이 오히려 몽골 지배의 궁극적 약화와 극복을 가능케 했다고 주장했다. 이 관점은 몽골의 침략을 단순한 '타타르의 멍에'로 보던 전통적 서사에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접목한 것으로, 전후 소비에트 동방학 및 몽골 제국 연구의 기초를 놓았다. 또한 그레코프는 『러시아 프라우다』의 학술판(1940, 1947) 편집을 주도하여 중세 루스 법제 연구의 문헌적 토대를 정비했으며, 그의 제자 블라디미르 파슈토는 동슬라브 중세사를 위한 외국 사료 수집 작업으로 이 유산을 계승했다.
≪키예프 루스≫와 봉건제 논쟁
그레코프의 대표작 ≪키예프 루스≫(1939)는 소비에트 중세사학의 분수령이 된 저작이다. 이 책에서 그는 고대 루스 사회가 노예제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공동체 체제에서 봉건제로 직접 이행했다고 주장했다. 당시까지 서유럽 학계와 일부 소비에트 학자들은 동슬라브 사회가 수렵·채집에 의존하는 후진적 구조라고 보았으나, 그레코프는 광범위한 고고학·문헌 자료를 동원해 키예프 루스가 고도로 발달한 경작 농업에 기반한 봉건 국가였음을 입증했다. 이 주장은 ≪전연방공산당사 단기강좌≫(1938)가 암시한 5단계 도식과도 긴장 관계에 있었으며, 이후 소비에트 역사학계에서 '봉건제 논쟁'을 촉발했다. 동시에 이 책은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가 제기한 우크라이나 중심의 키예프 루스 계승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키예프 루스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세 동슬라브 민족의 공동 요람으로 규정했다. 이 관점은 전후 소비에트 역사서술의 공식 입장으로 자리잡았고, 1991년 이후에도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학계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키예프 루스≫는 1939년 초판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되었으며, 1953년까지 소련에서만 6판을 거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