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사빈코프

Борис Савинков
소련 러시아 1879–1925 ✕ 처형/의문사

테러리스트에서 반혁명가로: 혁명의 검은 기사

1924년 재판정에서: '나는 플레베와 세르게이 대공 암살의 사빈코프다. 평생 인민을 위해 일했으나, 이제 노동자·농민 정권에 총을 겨누었다고 기소되었다.'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을 지휘하며 제정 고위관료 암살을 주도한 혁명가·작가. 『창백한 말』로 테러의 심리를 소설화했다. 10월 혁명 후 반볼셰비키 투쟁을 이끌었고, OGPU에 체포되어 루뱐카에서 사망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트러스트 작전 — OGPU의 역공작

1920년대 초, 사빈코프는 폴란드·파리에 거점을 둔 「조국과 자유수호인민동맹」(NSZRiS)을 이끌며 소련 영토 내 정보망을 운영하고 폴란드·프랑스·영국 정보기관에 정보를 제공했다. 1921년 네프 도입으로 내부 반소 여론이 잦아들자 사빈코프의 대중적 기반은 약화되었지만, 그의 조직은 여전히 테러·사보타주·봉기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OGPU는 1922년 5월 「신디카트-2」 작전을 개시했다. 아르투르 아르투조프가 입안한 이 작전의 핵심은 소련 내에 실재하지 않는 지하 반소 조직 「자유민주주의자」(LD)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사빈코프를 소련 영토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OGPU는 사빈코프의 측근 레오니트 셰셰냐를 국경에서 체포·전향시킨 뒤, 그의 친척이자 사빈코프 조직의 간부인 포미체프에게 "모스크바에 유력한 반소 조직이 있으니 지도자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내게 했다. 이 미끼에 걸려든 사빈코프는 자신의 신임 부관 알렉산드르 디크고프-데렌탈을 소련에 들여보냈고, 디크고프-데렌탈은 OGPU가 연출한 LD 조직의 실체를 확인하고 파리로 돌아와 사빈코프에게 직접 방문을 권했다.

1924년 8월, 사빈코프는 애인 류보프 디크고프 및 그녀의 남편과 함께 소련 국경을 넘었다. 민스크에서 OGPU 요원들에게 체포된 그는 모스크바로 압송되었다. 같은 해 8월 29일 소련 대법원 군사합의부는 사빈코프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그는 법정에서 "나는 무조건 소비에트 권력을 승인하며, 그 어떤 다른 권력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전연방 중앙집행위원회는 사형을 10년형으로 감형했다. 이 재판은 소비에트 권력이 옛 적조차 자신의 정당성 앞에 굴복시켰다는 선전 효과를 거두었다.

1925년 5월 7일, 사빈코프는 루뱐카 내무인민위원부 건물 5층 창문에서 투신해 사망했다. 공식 발표는 자살이었으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군도』는 전 체카 요원 아르투르 프류벨의 증언을 인용하며 사빈코프가 OGPU 요원 4명에 의해 창밖으로 던져졌다고 기록했다. 또 야코프 블륨킨이 사빈코프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증언도 전한다. 사빈코프의 매장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트러스트 작전은 1927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사빈코프 외에도 영국 정보원 시드니 라일리를 소련으로 유인해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작전은 20세기 첩보사에서 가장 정교한 역공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전투조직: 제정 암살과 테러의 문학

사빈코프가 역사에 남은 첫 장은 사회혁명당(SR) 전투조직(BO)의 실질적 지휘관으로서였다. 1903년 6월 볼로그다 유형지에서 탈출해 제네바로 향한 그는 SR에 입당했고, 곧바로 예브노 아제프가 이끄는 전투조직에 합류했다. 코드명 '파벨 이바노비치'를 받은 사빈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파견되어 표적 감시 임무를 맡았다.

전투조직의 첫 대규모 작전은 내무장관 뱌체슬라프 폰 플레베 암살이었다. 플레베는 유대인 학살(키시뇨프 포그롬)을 방조하고 탄압 정책을 주도한 인물로 혁명 진영의 최우선 표적이었다. 사빈코프는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아서 매컬로'라는 영국 자전거 회사 대리인으로 가장했고, 도라 브릴리안트를 애인으로, 예고르 사조노프를 하인으로 꾸며 값비싼 아파트에서 함께 생활하며 작전을 준비했다. 여러 차례의 실패와 폭탄 운반 중 사고로 포코틸로프가 사망하는 우여곡절 끝에, 1904년 7월 28일 사조노프가 플레베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해 암살에 성공했다. 이 성공으로 전투조직의 위상은 급상승했고, 사빈코프는 아제프의 부지휘관으로 공인되었다.

다음 표적은 차르의 숙부이자 모스크바 총독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었다. 사빈코프는 1904년 10월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러시아로 돌아왔고, 이반 칼랴예프가 투척 요원으로 나섰다. 1905년 2월 15일 칼랴예프는 대공의 마차에 대공비와 아이들이 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폭탄 투척을 멈추었다. 이틀 뒤인 2월 17일, 칼랴예프는 대공이 혼자 탄 마차를 공격해 암살에 성공했다. 칼랴예프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작전은 사빈코프의 테러리스트 경력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1905년 2-3월 밀고자 니콜라이 타타로프의 제보로 대규모 체포가 이어지며 전투조직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사빈코프는 간신히 해외로 탈출했다. 1906년 5월 세바스토폴에서 추흐닌 제독 암살을 준비하던 중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해군 장교의 도움으로 탈옥해 루마니아를 거쳐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1908년 말 아제프가 오흐라나의 첩자로 폭로되면서 전투조직은 해체되었고, 사빈코프는 아제프를 끝까지 옹호했다가 동지들로부터 배신자 취급을 받았다. 그는 1911년까지 전투조직 재건을 시도했으나 단 한 건의 성공적인 테러도 조직하지 못했고, 결국 정계에서 물러나 문학으로 전향했다.

바로 이 시기에 사빈코프는 필명 'V. 롭신'으로 가장 중요한 소설 두 편을 발표했다. 1909년 출간된 『창백한 말』은 세르게이 대공 암살 사건을 소재로, 테러리스트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해부한 자전적 소설이다. 제목은 요한계시록의 '사망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따르는' 창백한 말에서 따왔으며, 작품 전체에 묵시록적 색채가 짙게 깔려 있다. 사빈코프는 이 작품에서 테러리스트를 니체적 '강자'에 가까우면서도 자기 혐오와 회의에 시달리는 인물로 그렸다. 이 소설은 러시아와 해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윈스턴 처칠까지 읽을 정도로 널리 퍼졌다. 그러나 SR 동지들은 이 작품을 혁명 운동에 대한 배신이자 '도덕적 아제프주의'로 맹비판했다.

1912-1913년 연재된 『있지도 않은 일』은 1904년 이후 혁명 운동 전체를 한 가족의 서사를 통해 조망한 대작으로, 테러와 혁명 전반에 대한 깊은 환멸을 표현했다. 주인공은 '회개하는 테러리스트'이며, 사빈코프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이 혁명가로서 실패했고 러시아 혁명 운동 전체가 패배했다는 결론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 사빈코프의 문학은 혁명적 테러의 윤리적·심리적 기반을 가장 내밀하게 기록한 문헌으로, 20세기 초 러시아 모더니즘 문학의 독특한 갈래를 이룬다.

1917년: 임시정부와 코르닐로프 사건

1917년 4월, 사빈코프는 8년간의 망명을 끝내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는 즉시 임시정부제7군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곧 남서전선 전체의 수석정치위원이 되었다. 사빈코프는 전쟁을 승리까지 계속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7월 8일 코르닐로프 장군이 남서전선에 사형을 도입하자 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전선에서의 강력한 규율 회복은 전쟁장관 케렌스키의 주목을 받았고, 7월 말 사빈코프는 전쟁차관으로 임명되어 사실상 군부의 실무 책임자가 되었다.

이 시기 사빈코프는 케렌스키, 코르닐로프와 함께 삼두체제를 구상했다. 케렌스키가 민주적 정당성을, 코르닐로프가 군부의 질서를, 자신이 혁명적 의지와 실행력을 제공하는 구도였다. 사빈코프는 브루실로프를 대신해 코르닐로프를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코르닐로프의 군 기강 회복 정책을 정부 내에서 가장 일관되게 옹호했다.

8월 22일(구력), 케렌스키의 지시로 사빈코프는 모길료프의 최고사령부로 파견되어 코르닐로프와 협상했다. 핵심 의제는 볼셰비키 봉기를 선제 진압하기 위해 기병군단을 페트로그라드로 이동시키는 계엄령 도입 문제였다. 양측은 이 안건에 합의했으나, 코르닐로프가 군대를 이동시키자 케렌스키는 이를 쿠데타로 간주하고 8월 27일 그를 해임했다. 사빈코프는 페트로그라드 군정장관에 임명되어 수도를 방어할 임무를 맡았지만, 케렌스키의 급격한 정책 전환에 동의하지 못하고 8월 30일 사임했다. 코르닐로프 역시 사빈코프를 '누구의 등을 찌를지 모르는 인물'이라며 불신을 표하여, 사빈코프는 양측으로부터 의심받는 위치에 놓였다.

SR당 중앙위원회는 사빈코프를 코르닐로프 사건 관련 청문회에 소환했으나, 그는 당이 '도덕적·정치적 권위를 상실했다'며 출석을 거부했다. 1917년 10월 9일 SR당은 그를 제명했다. 혁명의 가장 유명한 테러리스트였던 사빈코프가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이 순간은, 그가 볼셰비키에 맞서 군사적·음모적 수단에 전념하게 되는 분수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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