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을 모스크바에서 분리해 낸, 독립 리투아니아의 첫 대통령이 된 공산주의자
1990년 1월 고르바초프가 빌뉴스까지 날아와 당의 분리를 되돌리라고 압박했을 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정은 당대회가 내렸고, 그것을 되돌릴 권한은 자신에게도 없다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경제 관리자 출신으로 1988년 사유디스의 지지 속에 리투아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12월 당을 소련공산당에서 분리하는 결정을 이끌었다. 연방 공화국의 집권당이 모스크바와 결별한 첫 사례였다. 독립 후인 1993년 첫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옛 공산당원이 선거로 집권할 수 있음을 보였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관리하면서 나토·유럽연합 가입의 길을 열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총리를 지냈다.
경력 연표
- 1965–1967리투아니아 SSR 건설자재공업부 장관
- 1967–1977리투아니아 SSR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의장
- 1977–1987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8–1989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9–1990독립 리투아니아공산당(소련공산당에서 분리) 제1서기
- 1990리투아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 1993–1998리투아니아 공화국 대통령
- 2001–2006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
관련 역사 사건
댐을 짓던 붉은 관리자, 인민이 고른 서기장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는 1932년 리투아니아 로키슈키스에서 태어나 카우나스공과대학에서 수력공학을 전공했다. 카우나스 수력발전소 건설로 경력을 시작한 그는 건설과 계획 부문을 거쳐 리투아니아공산당의 경제 담당 서기까지 올라간, 이념가가 아니라 관리자형의 전형이었다. 실무에 밝고 허세가 없는 그는 당 간부로서는 드물게 대중적 호감을 얻었다.
1988년 가을 사유디스의 대중 집회가 공화국을 뒤흔들자, 모스크바와 현지 보수파 사이에서 리투아니아공산당은 인물을 바꿔야 했다. 사유디스 군중이 이름을 연호한 것은 브라자우스카스였고, 그는 그렇게 대중운동의 압력 속에 제1서기가 되었다. 취임 직후 그는 빌뉴스 대성당을 교회에 돌려주는 결정으로 공화국을 놀라게 했다. 스탈린 시대에 몰수되어 미술관이 된 이 건물의 반환은, 당이 민족의 기억과 화해할 수 있다는 신호로 읽혔다.
당의 위신이 무너져 내리는 시대에, 그는 당을 지키는 길이 모스크바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따르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가가고 있었다.
1989년 12월, 모스크바와 결별한 첫 집권당
1989년 12월 리투아니아공산당 제20차 대회는 압도적 표차로 소련공산당으로부터의 독립을 의결했다. 연방을 이루는 공화국의 집권당이 중앙당과 조직적으로 결별한 것은 소련 역사상 처음이었다. 브라자우스카스의 계산은 명료했다. 다가올 자유선거에서 모스크바의 지부로 남은 당은 전멸할 것이고, 독립을 지지하는 민족적 당만이 살아남으리라는 것이었다.
충격을 받은 고르바초프는 1990년 1월 직접 빌뉴스로 날아와 사흘간 설득과 압박을 거듭했지만 빈손으로 돌아갔다. 군중 앞에서 연방 잔류를 호소하는 서기장에게 리투아니아인들은 정중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이 방문의 실패는 당의 권위로 공화국을 붙잡는 시대가 끝났음을 크렘린에 알린 사건으로 기록된다.
1990년 2월 선거에서 그의 당은 사유디스에 패했지만, 브라자우스카스 개인의 인기는 건재했다. 그는 3월 11일 독립 회복법에 찬성표를 던졌고, 새 정부의 부총리로 봉쇄의 겨울을 함께 버텼다. 당은 선거에서 졌지만, 그 지도자는 독립 국가의 건설자 대열에 서 있었다.
투표로 돌아온 옛 공산주의자, 대통령과 총리로
1992년 가을, 독립의 감격이 경제난의 피로로 바뀌자 유권자들은 브라자우스카스의 민주노동당(옛 공산당)에 총선 압승을 안겼다. 이듬해 2월 그는 60%의 득표로 독립 리투아니아의 첫 직선 대통령이 되었다. 서방 일부는 「공산주의자의 귀환」에 경악했지만, 실제의 그는 시장경제와 서방 통합 노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1994년 리투아니아의 나토 가입 신청서에 서명한 것도 그였다.
옛 집권당이 폭력이 아니라 선거로 물러났다가 다시 선거로 돌아오는 것. 브라자우스카스의 경력은 탈공산주의 이행의 이 교과서적 경로를 몸으로 보여 준 사례였고, 동유럽 곳곳에서 반복될 「옛 공산당의 사회민주주의적 귀환」의 이른 본보기였다.
1998년 그는 연임에 도전하지 않고 물러났다가, 2001년 총리로 복귀해 2006년까지 유럽연합 가입(2004)의 마무리를 지휘했다. 2010년 그가 죽었을 때, 정적이던 란츠베르기스조차 그가 독립에 기여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한 나라의 독립사에 옛 공산당 서기장과 반공 지도자가 나란히 건국자로 기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