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두슈

陈独秀
중국 중국 1879–1942 ○ 자연사

《신청년》으로 중국을 깨우고 공산당을 창당해 6년간 이끈 혁명가

“과학과 민주주의, 오직 이 두 분을 우리 선생으로 모셔야 한다.” — 《신청년》

중국 공산당의 주요 창립자이자 초대 총서기(1921–1927). 《신청년》으로 신문화운동을 주도했으며, 국공합작 붕괴 후 코민테른에 의해 해임·제명된 뒤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했다.

경력 연표

《신청년》과 신문화운동: '과학'과 '민주'의 깃발 아래

1915년 9월 상하이에서 창간된 《신청년》(원제 《청년잡지》)은 단순한 잡지가 아니었다. 천두슈는 창간호 「청년에게 고함」에서 '자주적이며 진취적이고 세계적이며 실리적이며 과학적인' 새로운 세대를 호출했고, 이는 구질서에 환멸을 느낀 전국 청년들의 정신적 기폭제가 되었다. 1917년 차이위안페이의 초청으로 베이징대학 문과 학장에 취임하면서 《신청년》 편집부도 베이징으로 이전했고, 후스·리다자오·루쉰·첸쉬안퉁 등이 편집진으로 합류하며 사상적 폭을 넓혔다. 잡지는 과학('사이언스 씨')과 민주주의('디모크라시 씨')를 중국 쇄신의 양대 기둥으로 내세우며 유교적 전통과 구습에 대한 전면적 비판을 전개했다. 특히 1917년 2월 천두슈가 발표한 「문학혁명론」은 '귀족 문학'을 타도하고 '국민 문학'을 세울 것을 선언하며, 수천 년간 지배적 지위를 누리던 한문(漢文) 대신 구어체 백화문(白話文)을 공식 문어로 정착시키는 언어 혁명의 신호탄이 되었다. 1918년 루쉰의 「광인일기」를 시작으로 백화문 창작이 본격화되었고, 발행부수는 1,000부에서 16,000부로 급증했다. 1918년 12월 천두슈와 리다자오는 보다 직접적인 시사비평지 《매주평론》을 함께 창간하여 1919년 5·4운동의 사상적 토양을 제공했다. 보수 세력의 압박으로 1919년 3월 베이징대학 학장직을 사임하고 6월 체포되어 83일간 투옥되었으나, 《신청년》이 길러낸 청년 세대는 이미 중국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훗날 천두슈를 5·4운동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말년의 정치사상: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재고

1937년 출옥 후 쓰촨성 장진에 정착한 천두슈는 자신의 혁명 경험 전체를 재검토하는 마지막 저술 활동에 들어갔다. 1937년부터 1942년까지 쓴 14통의 편지와 논문에서 그는 스탈린의 소련을 '일국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관료적 독재를 구축한 체제로 비판하는 한편, 트로츠키주의 진영과도 거리를 두었다. 천두슈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 자체가 민주주의를 훼손할 위험을 내포한다고 보았으며, 진정한 사회주의는 보통선거·언론의 자유·야당의 합법적 존재 등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제도적 성과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주의는 인류 진보의 보편적 원칙'이라고 선언하며 레닌주의적 전위당 모델에서 근본적으로 이탈했다. 이 말년의 저작들은 1948년 중국 트로츠키스트들에 의해 《천두슈 최후 논문 및 서한》으로 묶여 출판되었고,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독자적인 유산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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