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티스 E. 르메이

Curtis LeMay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06–1990 ○ 심장마비

일본을 불태우고 상대에게 핵폭격을 주장한 공군 원수

클레이가 '석탄이라도 실어날라 줄 수 있겠소?' 하고 묻자 르메이는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을 지휘한 인물로,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66개 도시를 소이탄으로 태웠다. 1948년 미 유럽공군 사령관으로서 베를린 봉쇄에 맞서 루시우스 클레이에게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하며 공수의 첫 단계를 세웠다. 이어 전략공군사령부(SAC)를 맡아 핵전력 중심의 제트 공군으로 개편했고, 1961년 공군 참모총장이 되어 쿠바 위기 때 미사일 기지 폭격을 주장했다. 은퇴 후에는 인종분리주의자 조지 월리스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1968년 대선에 나섰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48~1957년 전략공군사령부와 핵 선제타격 교리

르메이가 1948년 전략공군사령부(SAC)를 인수했을 때, 그 부대는 실질적인 전력이라기보다 제2차 세계대전 잔여 B-29 폭격단의 모임에 가까웠다. 가동 가능한 항공기는 절반에도 못 미쳤고, 승무원 훈련은 부족했으며, 기지와 항공기 보안 기준도 최소 수준이었다. 르메이는 핵폭격기를 채운 격납고에 무장하지 않은 초소병 한 명만 서 있는 것을 확인했다. 오하이오주 데이턴을 대상으로 한 모의 폭격 훈련에서는 대부분의 전략폭격기가 목표를 1마일 이상 빗나갔고, 그는 "이 지휘부 전체에서 전문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승무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술회했다.

이 진단은 곧 교리로 전환됐다. 1948년 11월 공군참모총장 호이트 밴덴버그와의 회동에서 두 사람은 SAC의 제1임무를 '한 번의 출동으로 미국 핵폭탄의 80퍼센트를 투발하는 능력'으로 합의했다. 같은 해 12월 공군 지도부는 "대량과 시간을 한데 압축하는 단번의 일격"으로 SAC의 핵 공세를 감행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르메이의 입장을 지지했다. 1949년 3월 르메이가 제출한 첫 SAC 비상전쟁계획은 30일 이내에 소련의 70개 도시에 133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내용을 담았으며, 그는 제3차 세계대전이 30일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공군 전략가들은 이런 종류의 선제타격을 '국가 살해'라고 불렀다.

이 계획은 즉시 반론에 부딪혔다. 합동참모본부가 대규모 핵타격의 효과를 연구하도록 특별히 구성한 하먼 위원회는 두 달 뒤 만장일치 보고서에서 그러한 공격으로 소련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을 것이며 소련 산업도 곧 회복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몇 주 안에 합동참모본부 임시위원회는 미국 핵무기고를 세 배로 늘릴 것을 권고했고, 밴덴버그는 이전의 70개에서 220개 목표를 타격할 수 있는 폭탄을 요구했다.

르메이는 1951년 44세로 네 번째 별을 받아 율리시즈 S. 그랜트 이후 최연소 미국 4성 장군이 되었다. 그는 한국전쟁 중에도 SAC 사령관으로서 유엔군 작전에 관여했고, 1988년 미 공군 사료연구관들과의 인터뷰에서 전쟁 초기에 "조선의 일부 도시에 소이탄으로 SAC를 풀어놓아야 한다"는 요청을 국방부에 비공식적으로 전달했으나 민간인 피해가 너무 클 것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고 밝혔다. 이어 "결국 우리는 거기 가서 싸웠고, 결국 조선의 모든 도시를, 남한의 일부 도시까지도 어떤 식으로든 다 태워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1956~1957년 24시간 폭격기·급유기 경계태세 시험을 시행하며 SAC를 현대적인 전제트 전력으로 개편했고, 1957년 공군 부참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만 그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프로그램에는 회의적이어서 탄도미사일을 '장난감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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