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흐바타르

Сүхбаатар
몽골 국가기관 마르크스-레닌주의 몽골 몽골 1893–1923 독살설 · 병사설, 미확정

1921년 몽골 인민혁명의 군사 지도자, 사후에 ‘혁명의 아버지’로 정전화됐다

1921년 2월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3월 캬흐타를 점령하고 7월 6일 후레에 입성했으며, 7월 11일 새 정부에서 군사부 장관이 됐다. 이 임명을 1922년 7월로 적는 몽골어권 기록도 있다.

몽골의 혁명가이자 몽골인민당 창립 성원이며, 1921년 혁명에서 인민유격대를 이끌어 후레(오늘날 울란바타르)에 입성했다. 가난한 아랫(평민) 출신으로 활자공과 역참 마부로 일했고, 1919년 후레의 반중국 지하조직에 참여했다. 1920년 소련 방문에 나섰고 1921년 캬흐타에서 총사령관으로 확정됐으며, 같은 해 7월 군사부 장관이 됐고 11월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났다. 사인은 확정되지 않았고, 사후 신격화 경위도 주요 논쟁점이다.

다른 이름: 담딘 수흐바타르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혁명정부의 불안정과 마지막 나날(1921~1923)

1921년 7월 11일 인민정부가 공식성을 얻고 수흐바타르가 군사부 장관이 되었으나, 새 정부의 지위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반혁명 음모설이 잇따랐고, 1922년에는 보도, 차그다르자프, 다-라마 푼차그도르지 등이 새 국가의 내외 적과 결탁했다는 혐의로 처형됐다. 러시아어권 기록은 이들을 노동계급이 아니라 새 국가의 적대 세력으로 규정된 인물로 적고, 처형을 추진한 단잔이 이후 권력에서 밀려났다고 전한다. 몽골어권 기록 가운데에는 이 처형이 수흐바타르 자신의 명령으로 샤르 하드에서 집행됐다고 적는 곳도 있으나, 영미권과 러시아어권 서술은 처형 사실만 전하고 명령 주체는 밝히지 않으므로 확정된 사실로 서술하지 않는다.

같은 해 1월 10일 그는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3년 차강 사르를 앞두고 다시 쿠데타 음모가 적발되면서 경계 태세가 이어졌고, 2월 14~15일 밤 초소를 순시한 뒤 병으로 쓰러져 엿새 뒤인 2월 20일 서른 살에 사망했다. 독살설은 1940년대 초이발산 집권기에 제기됐고 몽골에서 지금도 일부 회자되며, 폐렴 사망설도 있으나 어느 쪽도 공식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당시 최고 권력기구였던 군사위원회 의장 엘베그 린치노가 장례를 주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