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쇄를 국제 연대로 만든 냉전 외교가
“유엔에서는 미사일 위협 제거를, 미주기구에서는 리우 조약에 따른 공동행동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딘 러스크는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국무부를 거쳐 미국 외교의 중심에 선 국제주의자였다.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군사적 충돌을 통제하면서도 봉쇄를 선택했고, 미주기구와 유엔을 통해 그 조치를 국제적으로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점차 개입을 강하게 옹호해, 국제법과 동맹 외교를 중시한 인물이 전쟁의 정당화에도 관여한 긴장을 남겼다. 퇴임 뒤에는 그루지야대학교에서 국제법과 외교를 가르쳤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61–1969 외교·국제활동 · 미국 국가기관
경력 연표
- 1934–1940밀스 칼리지 정부학 교수
- 1941–1945미 육군 중국·버마·인도 전구 참모장교
- 1947–1949국무부 특수정치업무국장
- 1949–1950국무부 차관보급 부차관
- 1950–1952극동 담당 국무부 차관보
- 1952–1961록펠러 재단 회장
- 1961–1969미국 국무장관
- 1970–1984그루지야대학교 국제법 교수
관련 역사 사건
퇴임 이후: 전쟁을 반성하지 않은 회고
1969년 1월 20일 러스크는 국무장관으로서의 마지막 날을 마치고 조용히 워싱턴을 떠나 그루지야로 돌아갔다. 퇴임 직후 그는 심한 우울증과 심리적 소진에 시달려 1969년 한 해 동안 제대로 일하지 못했고, 록펠러 재단이 그를 '저명 연구원'으로 보수까지 지급하며 그해를 뒷받침했다. 그에게는 국무장관 8년의 정신적 소모가 컸다.
1970년 그는 애선스의 그루지야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로 돌아가 1984년까지 국제법을 가르쳤다. 그는 1940년에 그만두었던 학자 생활로 돌아간 것을 정서적으로 만족스러워했고, 동료 교수들은 그가 마치 '종신 재직을 바라는 조교수'처럼 처신했다고 기억했다. 한편 일부 대학 이사회 인사는 인종 간 결혼을 허용한 그를 문제 삼아 임용을 막으려 했으나 무산되었다. 1970년대 그는 데탕트에 반대하고 핵 군비 통제 조약을 불신한 강경파 모임인 '현재의 위험 위원회'에 참여했으며, 1973년에는 존슨의 유해가 안치되었을 때 추도사를 했다.
개인적으로는 전쟁이 가족을 갈랐다. 아들 리처드는 전쟁에 반대했으나 아버지를 위해 해병대에 자원했고, 그 심리적 부담으로 신경 쇠약을 겪으면서 부자 관계가 끊겼다. 두 사람은 1970년 이후 대화를 하지 않다가 1984년 리처드가 알래스카에서 그루지야로 돌아와 화해를 청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이 무렵 러스크는 이미 눈이 멀어 있었고, 아들에게 구술해 회고록 《내가 본 대로》(1990)를 남겼다. 이 책에서 그는 베트남에서의 자기 역할을 사과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개입이 정당하고 필요했다는 확신을 유지했다. 반전 언론이 전쟁을 불리하게 보이도록 기사를 '조작'했다고 비난했고, 이른바 '언론의 자유'를 냉소했으며, 로버트 케네디와 우탄트에 대해서는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냉전 자체에 대해서는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할 증거를 보지 못했고 그럴 가능성도 '심히 의심한다'고 밝혔다. 1994년 12월 20일 애선스에서 85세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