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

Дмитрий Дмитриевич Шостакович
소련 러시아 1906–1975 ○ 폐암

소비에트 세기의 음악을 쓰고 두 번의 공식적 파멸을 통과한 작곡가

「나의 교향곡 대부분은 묘비명이다. 우리 민족이 죽임을 당한 모든 이들을 위한 기념비다.」 — 솔로몬 볼코프가 기록한 구술 회고에서

15개의 교향곡과 15개의 현악사중주를 남긴 20세기 최대 작곡가 중 한 명. 1926년 페트로그라드 음악원 졸업작인 제1교향곡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34)은 초연 후 2년 만에 『프라우다』의 「음악 대신 혼란」 기사로 공격받았다. 전시 레닌그라드에서 작곡한 제7번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소련 저항의 상징이 되었으나, 1948년 즈다노프의 '형식주의' 비판으로 다시 한 번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이후 교향곡, 실내악, 영화음악 등에서 소련 체제와 예술가 양심 사이의 긴장을 음악으로 증언하며 생을 마감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36년의 규탄과 대숙청의 그림자

1936년 1월 26일, 스탈린은 볼쇼이 극장에서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관람한 뒤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떴다. 이틀 후 『프라우다』는 「음악 대신 혼란」이라는 무기명 사설을 게재했고, 이는 스탈린이 직접 쓰거나 지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쇼스타코비치는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커튼콜을 받았다고 목격자들은 전한다. 같은 해 2월, 발레 『밝은 시냇물』도 추가로 공격받았다.

이 사건은 대숙청의 시작과 정확히 겹친다. 1936~1938년 사이 쇼스타코비치는 후원자였던 투하쳅스키 원수(1937년 6월 처형), 음악학자 니콜라이 질랴예프(처형), 처남 프세볼로트 프레데릭스(체포), 장모 소피야 바르자르(수용소 행), 친구인 작가 갈리나 세레브랴코바(20년 수용소) 등 수많은 주변 인물을 숙청으로 잃었다. 작곡가는 체포를 예감하고 밤이면 복도 계단참에서 기다렸다고 전해지며, 이미 완성된 제4교향곡의 리허설을 철회했다.

그의 대응은 제5교향곡이었다. 1937년 11월 초연된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창조적 응답'으로 포장되었으나, 음악은 표면 아래 비탄과 공포를 담고 있었다. 청중은 울었고, 당국은 그가 '과오에서 배웠다'고 선언했다. 쇼스타코비치는 다시 살아남았다. 그러나 1936년의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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