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바실리예비치 예프레모프

Дмитрий Васильевич Ефре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60 ○ 자연사

NKVD 수사 받던 전기기술자가 전기공업장관이 되어 원자폭탄의 동위원소 분리법을 낳기까지

NKVD 수사를 받으며 갇혀 있던 연구실에서 그는 발전기를 설계했다. 13년 후, 그가 주도한 전자기 분리법으로 소련은 수소폭탄의 리튬-6을 얻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치과기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레닌그라드 공업대학을 졸업하고 '엘렉트로실라' 공장에서 평생 전기기계공학에 헌신했다. 1938년 NKVD 수사를 받았으나 수감 중에도 공장 내 특수연구실에서 발전기 설계를 계속했고, 전쟁 발발로 풀려나 주임기사로 전시 생산을 이끌었다. 1951년 전기공업장관에 올라 스탈린 말기 전기기계·케이블·무선·전력기기 부문을 총괄했으며, 특히 전자기 동위원소 분리법 개발과 리튬-6 생산 기술 확립을 주도해 소련 핵무기 계획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네 차례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수상한 과학자-행정가로서, 말년에는 원자력이용총국 부국장으로 핵에너지 평화적 이용으로 전환하는 과도기를 감독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특별설계국(ОКБ)과 가속기 건설의 지휘자, 1945~1956

1945년 11월 21일자 예프레모프의 서한은 소련 원자력 사업에서 그가 맡은 조직적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이 서한에서 「엘렉트로실라」 공장에 특별설계국(ОКБ)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고 그 활동의 기술적·조직적 조건을 직접 정식화했다. 같은 해 12월 27일 인민위원회 결정으로 특별설계국이 실제로 조직되었고, 공장 주임기사였던 그가 그 장을 맡았다. 설계국의 첫 과제는 전자기적 방법으로 고농축 우라늄-235를 얻기 위한 장비와 제어 계통의 개발이었다.

소규모 집단이었음에도 설계국은 곧 핵물리학, 고에너지물리학, 제어열핵융합 분야의 기초 연구용 장비를 만드는 주력 개발 집단으로 자리 잡았다. 예프레모프는 1946년부터 소련 최초의 대형 양성자 가속기인 둡나의 500 MeV 싱크로사이클로트론 건설을 이끄는 책임자 중 한 사람이 되었고, 이 가속기는 이례적으로 짧은 기간에 세워져 1949년부터 실험이 시작되었다. 1951년 5월 5일 각료회의 결정으로 자기 열핵반응로(МТР) 사업이 편성되었을 때 그는 아르치모비치 밑에서 설계·구성 부분의 부책임자로 임명되기도 했다. 1953년부터는 둡나 공동핵연구소용 10 GeV급 양성자 싱크로트론의 매개변수 선정에도 참여했다.

1954년 설계국은 독립 기관으로 분리되어 메탈로스트로이 정착지로 옮겨졌고, 그가 1956년 3월까지 그를 이끌었다. 1960년 이 기관은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산하로 넘어가 전기물리장치연구소(НИИЭФА)로 개칭되었고, 1961년 창립자이자 초대 지도자인 예프레모프의 이름이 붙었다. 그가 남긴 것은 개별 발명품이 아니라 이 기관 자체, 즉 소련 가속기·전기물리장비 개발의 조직적 기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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