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전 참전용사, 쿠데타 장갑차에 맞선 마지막 소련영웅
BMP 장갑차의 관측창에 방수포를 씌우려고 뛰어올랐다. 사수가 포탑을 돌려 떨어뜨렸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 달려가 장갑차에 올라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 공수부대 하사로 제대 후 모스크바에서 지게차 기사로 일했다. 1991년 8월 21일 새벽, 루츠코이의 '아프간 동지들' 호소를 듣고 백악관 방어선에 합류했으며 차이콥스키 터널에서 BMP 장갑차의 관측창을 막으려다 깔려 사망, 쿠데타 유일의 세 희생자 중 한 명이 되었고 사후 소비에트연방영웅과 '자유 러시아 수호자' 메달 1호를 받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86–1989공수부대 복무,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근위하사)
- 1989–1991모스크바 '인테리어' 생산조합 지게차 기사
- 1991.08.218월 쿠데타 당시 차이콥스키 터널에서 백악관 방어 중 사망
관련 역사 사건
죽음의 경위와 수사: 공식 버전과 이견
코마리의 죽음은 목격자와 수사기관의 진술이 엇갈리는 사건으로, 공식 결론과 이견이 오래 병존했다. 수사기관의 버전에 따르면 1991년 8월 21일 자정 무렵 그는 백악관에서 스몰렌스카야 광장 방향으로 이동하던 차량 행렬의 BMP(차체번호 536)에 올라 관측창을 덮어 승무원의 시야를 가리려 했고, 승무원이 포탑을 돌려 그를 떨어뜨렸으나 다시 따라붙어 열린 낙하산 병력용 해치로 뛰어들었다. 기계운전수가 차량을 급히 흔들자 차체 밖으로 던져졌고, 열린 해치 덮개에 옷자락이 걸린 채 장갑차 차체에 머리를 부딪혀 숨졌다. 다른 자료는 그가 아프간전 참전자였던 소령 세르게이 추린과 함께 장갑차에 올라 브레젠트로 관측창을 가리려 했으며, 소령의 제지를 무시하고 열린 뒤쪽 해치로 들어가려다 차량이 급선회하면서 문에 발이 걸려 매달렸고 얼마 뒤 아스팔트 위로 떨어졌다고 전한다. 이 버전에서는 뒤로 후진한 운전수가 그를 깔아 죽였다고 본다. 톤넬 사건을 다룬 문서도 그가 브레젠트를 관측창에 던지다 그것에 걸렸고 차량의 급기동으로 머리를 다쳐 숨졌다고 정리한다.
BMP 536 승무원에 대해서는 형사 사건이 입건되었으나, 1991년 12월 20일 모스크바 검찰의 결정으로 ‘형사처벌할 만한 행위의 구성요건이 없다’는 이유로 종결되었다. 이후에도 죽음의 경위는 논쟁으로 남았다. 1992년 어머니는 공식 사망 결론과 목격자 진술, 특히 총을 쏘았으나 명중 여부를 확신하지 못한 군인 코슈카르바이 바이무라토프의 증언 사이의 모순을 근거로 러시아 검찰총장에게 아들의 시신 발굴과 추가 감정을 요구했다. 한편 국가비상위원회 사건 피고인 중 한 명을 변호한 유리 이바노프는, 코마리가 지렛대를 들고 장갑차에 올라 문을 열었고 그 안에 있던 병사 사인하자예프가 이를 보고 자동소총을 쏴 그를 죽였다는 다른 버전을 제기하면서 그가 중간 정도의 만취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사망의 직접 원인은 지금도 단일하게 확정되지 않았고, 어떤 정황에서는 차량에 깔린 것으로, 다른 주장에서는 총격으로 설명된다. 톤넬 사건에서 희생된 세 사람은 1991년 쿠데타의 유일한 사망자로 기록되었으며, 무엇보다 이 사건이 국가비상위원회 위원들이 백악관 강습을 시도하지 않은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점이 강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