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 복고를 지향한 세르비아 민족주의 군 지휘관
1941년 티토와의 협상에서 그는 총봉기가 시기상조라며 거부했고, 두 저항운동의 결별은 곧 무장 충돌로 이어졌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군 장교로서 제2차 세계대전 뒤 왕정과 세르비아 민족주의 질서를 회복하려 한 체트니크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941년 라브나 고라에서 점령군에 맞선 조직을 세웠지만, 전면 봉기보다 전후 권력 장악을 준비하는 전략을 택하며 티토의 파르티잔과 충돌했다. 체트니크 일부와 그의 지휘망은 추축국 및 협력 세력과 협력했고, 이러한 선택은 다민족 유고슬라비아에서 운동의 기반을 약화시키며 연합국의 지지를 파르티잔으로 옮기는 데 영향을 주었다. 전후 그는 반역과 전쟁범죄로 처형되었고, 세르비아 대법원은 2015년 재판이 정치적으로 동기화되었다고 보아 판결을 뒤집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12–1913세르비아군 사관후보생, 발칸 전쟁 참전
- 1914–1918세르비아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35–1936불가리아 주재 군사 attaché
- 1936–1939체코슬로바키아 주재 군사 attaché, 참모 장교
- 1941유고슬라비아 제2군 참모장 대리
- 1941–1945유고슬라비아 국내군 체트니크 지휘관
- 1946반역·전쟁범죄 재판, 처형
관련 역사 사건
1944년 핼리어드 작전과 연합국 관계의 붕괴
1944년 미하일로비치를 둘러싼 연합국의 정책은 파르티잔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영국은 1943년 말 테헤란 회담에서 처칠이 티토 지원을 주장한 뒤, 미하일로비치 파견 연락장교단을 1944년 봄에 철수시켰다. 처칠은 1943년 12월 10일 런던에서 페타르 2세에게 미하일로비치의 적대국 협력에 관한 증거가 있다고 말하며 그를 유고슬라비아 내각에서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같은 해 봄, 영국 연락장교 암스트롱은 미하일로비치가 주로 대추축 선전 활동에 머물렀고 지난 6~8개월 동안 여러 사보타주 기회를 놓쳤다고 보고했다. 1944년 5월 영국 사절단이 철수한 뒤 미하일로비치는 연합국과 자기 정부에 계속 전파를 보냈으나 답신을 받지 못했다. 1944년 7월에는 이반 슈바시치가 새 망명 정부를 구성하면서 그를 각료에서 제외했고, 8월 29일 페타르 2세는 최고사령부를 해체하는 칙령을 내려 그의 직위를 폐지했다.
그럼에도 1944년 7~8월 미하일로비치는 전략정보국(OSS) 및 제60수송비행단과 협력해 격추된 연합국 조종사들을 구출하는 핼리어드 작전(Halyard)을 수행했다. 세르비아의 여러 임시 활주로에서 1944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 수백 명의 연합국 조종사가 공수로 빠져나갔다. 역사가 요조 토마세비치가 인용한 OSS 보고서에 따르면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가 417명의 연합국 조종사를 구출했고, OSS의 리처드 켈리 중령에 따르면 핼리어드 작전 기간에 미국인 432명과 연합국 요원 80명이 공수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트루먼 대통령은 1948년 3월 29일 그에게 훈공장(Legion of Merit)을 사후 수여했으며, 수훈 명령에는 그와 그의 부대가 불충분한 보급과 극심한 곤경 속에서도 연합국의 최종 승리에 물질적으로 기여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 그는 자기 진영의 한계에도 부딪혔다. 미하일로비치는 지역 지휘관들에 대한 통제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라디오 연락이 없는 부대는 전령에 의존했다. 파블로비치에 따르면 파블레 주리시치는 무슬림 마을들을 파괴했다고 그에게 자랑스럽게 보고했는데, 미하일로비치는 그러한 행위를 명령하지는 않았고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944년 8월 11일 니콜라 칼라비치를 비롯한 그의 장교들은 독일 장교들을 만나 협력 확대 조건을 논의했고, 네디치와의 비밀 회동도 8월 20일경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1944년 9월 1일 총동원령을 내린 뒤 그의 부대는 독일군과 불가리아군에 맞서 싸우면서 파르티잔의 공격도 받았다. 붉은 군대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방면에서 진입하면서 체트니크와 잠시 협력하기도 했으나 곧 무장을 해제했고, 소련 사령부에 파견된 그의 대표단은 무시된 채 체포되었다.
미하일로비치의 운동은 소련군, 파르티잔, 불가리아군의 공격과 퇴각하는 독일군과의 교전 속에서 세르비아에서 붕괴했다. 그는 서방 연합국의 상륙을 여전히 기대하며 보스니아로 향했고, 오즈렌 고지에서 재편성을 시도했으나 부대는 소모되었다. 1945년 5월 10일 젤렌고라 전투에서 유고슬라비아군에게 패한 뒤 그는 소수의 부하와 함께 산속으로 숨었다. 유고슬라비아 당국은 그를 생포해 재판을 열기를 원했고, 1946년 3월 13일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