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트 다비트

Eduard David

농업 문제에서 출발한 사회민주당 수정주의자, 「8월 4일 정책」의 설계자이자 국민의회 초대 의장

독일 사회민주당 우파의 정치가. 김나지움 교사였으나 1894년 사회민주당 활동으로 해임되었고, 소농 경영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농업론으로 당내 최초의 수정주의자로 꼽힌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사회주의 식민 정책을 옹호했고, 1914년 8월 4일 전쟁공채 찬성 결정을 주도했다. 1919년 바이마르 국민의회 초대 의장을 거쳐 무임소 장관과 내무장관을 지냈다.

다른 이름: 에두아르트 하인리히 루돌프 다비트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농업 수정주의에서 「8월 4일」까지

다비트는 프로이센 공무원의 아들로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기센 대학에서 독문학·역사·철학을 공부해 김나지움 교사가 되었다. 1893년 친구 지몬 카첸슈타인과 함께 소농을 사회민주당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주간지 《중부독일 일요신문》을 창간했는데, 창간호에 「계급투쟁」이라는 말이 한 번도 없다는 지적에 그는 바로 그 점이 농촌에서 신문을 매력 있게 만든다고 답했다. 이 활동 때문에 그는 1894년 공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공업의 집중 경향이 농업에 그대로 들어맞지 않으며, 농민 소경영은 몰락할 운명이 아니라 앞날이 있는 경영 형태라고 주장했다. 1894년 프랑크푸르트 당대회에서 그는 에르푸르트 강령에 농업 강령을 더하자고 요구했지만, 1895년 브레슬라우 당대회는 카우츠키가 쓴 반대 동의에 따라 농업 강령안을 부결했다. 그는 1903년 『사회주의와 농업』을 펴냈고, 1899년 하노버 당대회에서 베벨이 베른슈타인을 공격하자 첫 연사로 나서 그를 변호했다. 이 때문에 그는 당내 최초의 수정주의자로 불린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그는 독일 대표단 다수가 다수안을 지지한다고 밝히며 「모든 식민 정책에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첫 문단을 옹호했고, 레데부어의 논리를 공격했다. 1914년 8월 4일 사회민주당 원내단이 하제 의장의 반대를 누르고 전쟁공채에 찬성한 결정에 그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5년 12월 반대표를 던진 20명의 의원을 제명하자고 요구했고, 1917년에는 의회 다수파의 평화 결의안 초안을 썼다. 1918년 10월 사회민주당이 처음 정부에 들어가자 외무부 차관이 되어, 「1914년 8월 4일에서 1918년 10월 5일까지의 길」이 열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