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니 예피모브나 카플란

Фанни Ефимовна Каплан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 1890–1918 ✕ 처형

사회혁명당 활동가로, 레닌을 '혁명의 배신자'로 간주하고 단독 암살을 결행한 여성

체카 심문에서: '나는 오늘 레닌에게 총을 쐈다. 나 혼자 한 일이다. 나는 그를 혁명의 배신자로 간주한다. 나는 제헌의회를 지지했고 지금도 지지한다.'

볼린주 유대인 교사 가정에서 태어난 파니 카플란은 16세에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다 키예프 총독 암살 기도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 11년간의 수감 중 실명과 회복을 반복했으며, 마리야 스피리도노바의 영향을 받아 사회혁명당(SR)에 합류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된 후, 볼셰비키의 제헌의회 해산을 계기로 레닌을 혁명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1918년 8월 30일 모스크바 미헬손 공장에서 권총 세 발을 발사했다. 이 사건은 같은 날 모이세이 우리츠키 암살과 함께 적색 테러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으며, 그녀는 나흘 뒤 크렘린에서 처형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신원 확인, 심문, 그리고 논쟁이 된 책임

체포 경위부터가 단일한 서술로 정리되지 않는다. 볼셰비키 측 부청장 S. N. 바툴린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레닌에게서 스무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세 발의 총성을 듣고 쓰러진 레닌을 보았으며, 수상해 보이는 여성을 붙잡았는데 그 여성이 카플란이었다. 반면 공장 위원 N. I. 이바노프는 거리에서 자신을 따라온 아이들의 지목을 받은 뒤에야 그녀를 체포했다고 주장했다. 같은 사건의 체포 장면이 두 갈래 증언으로 남은 것이다.

체카 심문에서 카플란은 "오늘 레닌에게 총을 쐈다. 나 혼자 한 일이다. 권총을 어디서 얻었는지는 말하지 않겠다"고 진술하고, 자신이 '혁명의 배신자'라고 규정한 레닌을 죽이기로 오래전에 결심했다고 밝혔다. 카플란은 제헌의회를 지지했고 여전히 지지한다고도 말했다. 러시아어 사료는 그녀가 1918년 2월 심페로폴에서 로스푸스크 제헌의회를 계기로 결심을 굳혔고, 레닌의 행동이 사회주의 사상을 수십 년 후퇴시킨다고 보았다고 전한다. 살해 이유를 자기 개인으로 한정했고 어느 당의 지령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심문에서 공범을 밝히지 않자 그녀는 처형되었다. 볼셰비키는 체카가 이 사건들을 잇는 증거를 찾지 못했는데도 연이은 발생을 중대하게 보아 반대파 탄압을 급격히 확대했고, 카플란 총격 수 시간 뒤 적색 테러를 선포하는 공식 법령이 나왔다. 같은 날 페트로그라드에서 우리츠키가 암살되었고, 그 다음 몇 달 동안 우파 사회혁명당원 등 약 800명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사료는 심문 자체가 형식적이었고 제대로 된 수사가 없었다고 기록한다. 카플란 총격의 실제 실행자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다. 볼코고노프 같은 역사가들은 카플란이 실제 범인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아 이를 볼셰비키 역사의 '미스티피카치야' 중 하나로 불렀고, 바크스베르크는 다른 사회혁명당원 리디야 코노플레바를 실행자로 지목했다. 카플란은 거의 실명 상태였고 목격자 누구도 그녀가 총을 쏘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점, 페테르스의 전보가 단일 용의자가 아니라 여러 명의 체포를 언급한다는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 러시아어 사료는 1922년 엑스선 검사로 세 발 중 최소 두 발이 레닌에 적중한 것이 확인되었고, 레닌 시신에서 나온 총알이 카플란에게서 압수된 권총의 탄과 맞지 않는다는 주장은 1970년대 이민자 출판물에서 처음 나타난 것이라고 적는다. 그 권총은 노획품 목록에 브라우닝 M1900 150489호로 등록되어 있었다. 1918년 8월 당시 혼란한 정보 속에서도 카플란은 스스로를 단독 실행자로 규정했고, 그 자기 규정이 이후 역사 서술에서 가장 논쟁적인 대목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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