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재판을 집행한 공산주의 법관
그는 1989년에도 너지 임레를 유죄라고 주장하며 판결을 뉘우치지 않았다.
비더 페렌츠는 불법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된 뒤 전후 헝가리의 사법·당 관료로 올라선 공산주의 법률가였다. 그는 1956년 혁명 뒤 국가가 조직한 보복 재판에서 가장 많은 사형을 선고한 법관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58년 너지 임레 재판에서 대법원 인민법정회의를 주재하며 피고인의 발언과 변호 측 증거 신청을 거듬없이 제한했고, 너지 임레와 기메시 미클로시, 말레테르 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1989년에도 판결의 불법성을 인정하거나 뉘우치지 않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53–1972 법률·사법 · 헝가리
경력 연표
- 1934세게드 법학원 졸업, 팔레스타인 공산당 창립에 참여
- 1935–1942헝가리 불법 공산주의 운동 참여, 변호사 수습
- 1942–1945쇤헤르츠 재판에서 종신형 선고, 독일로 강제 이송
- 1945–1949헝가리 공산당 지구위원회 서기, 내무부 고문
- 1951–1953법무부 근무
- 1953–1972대법원 법관, 인민법정회의 주재 및 법원 평의회 부의장
- 1958너지 임레 재판 주심 법관, 사형 판결 선고
관련 역사 사건
1956년 이후 보복 재판의 인민법정회의 주재
비더 페렌츠의 이름은 1956년 이후 보복 재판의 구조 자체와 분리되지 않는다. 1957년 4월 대법원 안에 인민법정회의가 설치되면서 이 기구는 정치적 특별재판소의 성격을 띠었다. 기소장 없이도 피고를 재판에 세울 수 있었고, 대법원 인민법정회의는 사건을 임의로 끌어와 심리할 수 있었으며, 너지 임레 사건도 이렇게 회부되어 상소의 여지 없이 단심으로 처리되었다. 비더는 이런 인민법정회의를 주재하는 법관이었다.
그가 1956년 혁명 이후 활동을 이유로 1심 또는 2심에서 사형을 선고한 사람은 모두 20명이었다. 너지 임레 재판 외에도 데리 티보르 일당, 에르되시 페테르, 하라스티 샨도르 일당, 카르도시 라슬로 일당, 뢰체이 팔, 메레이 페렌츠 일당, 잠보키 졸탄 일당, 코르빈 광장 봉기군 무장 지휘관 이반 코바치 라슬로 일당, 체펠 봉기자 센테 카로이 일당 등에 대한 재판이 그의 손을 거쳤다.
재판의 진행 방식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는 변호 측의 모든 신청을 이유를 대지 않고 기각했고, 피고가 증인 소환과 문서 제출을 요구해도 이를 전혀 또는 극히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였다. 변호 측은 증인을 한 명도 세우지 못했고, 법정에 선 증인은 모두 기소 측 증인이었다. 그는 피고인을 중간에 끊고 자기 입장을 펼칠 틈을 주지 않았으며, 훈계조로 말을 막았다. 기록은 그가 “정직하고 깊은 격분, 나아가 증오”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피고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고 전한다.
이러한 태도는 우연이 아니었다. 대법원장 도모코시 요제프는 그에게 너지 임레 사건을 맡기며, 판결을 내릴 때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 준다고 말했다. 비더 본인은 1989년 인터뷰에서 “나는 정말로 많은 사람을 사형에 처했다”고 말하면서도 복수심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1958년 6월 15일 인민법정회의는 너지 임레에게 사형과 전 재산 몰수를 선고했고, 기메시 미클로시와 말레테르 팔에게도 사형을 선고했다. 비더는 1989년 인터뷰에서 너지 임레 일당의 사건에 그런 정치적 구상이 없었다고 주장했고, 자기 재판에서 어떤 위법도 없었다고 끝까지 부인했다. 그가 인정한 것은 첫 심리 경험이 극히 적은 상태에서 “절차 규칙 몇 가지를 어겼을” 가능성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