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영국 망명 끝에 소비에트 최초의 페르시아 대사가 된 볼셰비키 역사가
레닌은 1920년 7월 로트시테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러시아로 오는 문제에 대해 나는 양면적인 생각이다. 당신은 런던에서의 활동에 대단히 중요하다. 추방당하게 내버려두라 ― 감히 그럴 용기가 있는지 두고 보자."
30년간 영국에서 활동한 볼셰비키 망명가. 1921년 초대 주페르시아 소비에트 대사로 차르의 불평등조약을 폐기했고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를 설립했다. 영국 노동운동과 제국주의를 연구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다.
경력 연표
- 1891정치적 이유로 러시아 제국을 떠나 영국으로 망명
- 1895–1911사회민주연맹(SDF) 가입, 1901–1906년 집행위원
- 1901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 가입, 볼셰비키 파벌 지지
- 1911–1920영국사회당(BSP) 좌파 지도자, 반전 입장 견지; 《The Call》 기고
- 1914–1918영국 외무성 및 전쟁성에서 러시아어 통번역관으로 근무
- 1920영국 공산당(CPGB) 창립 기여, 소비에트 러시아로 귀국
- 1921–1923주페르시아 RSFSR 전권대표, 소련-이란 조약 체결
- 1923–1930외무인민위원부 collegium 위원, 《국제생활》 책임편집자
- 1924–1925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IMKhMP) 초대 소장
- 1927–1945《대소비에트백과사전》 제1판 주필진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45–1946레닌 훈장(1945), 노동적기훈장(1946) 수훈
30년 영국 망명과 좌파 사회주의 운동
1891년 제정 러시아를 떠나 영국에 정착한 로트시테인은 곧 영국 노동운동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다. 1895년 헨리 하인드먼의 사회민주연맹(SDF)에 가입했고 1900년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1906년까지 활동했다. 1901년 RSDLP에도 가입, 볼셰비키를 지지했으며 레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레닌은 런던 방문 시 해크니 클랩턴 스퀘어에 있는 로트시테인의 집에 자주 머물렀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영국 외무성과 전쟁성에서 러시아어 통번역관으로 근무하면서도 BSP 내에서 하인드먼의 친전 노선에 맞서 좌파 반전파를 이끌었고, BSP 기관지 《The Call》에 활발히 기고했다. 전쟁 후에는 영국 공산당(CPGB) 창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리트비노프·마이스키·페테르스 등 러시아 망명 혁명가들의 런던 정착을 도왔다. 1920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뒤 영국 정부의 재입국 거부로 귀국하지 못하고 소비에트 러시아에 남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학술 제도 건설자
로트시테인은 외교관이기 이전에 30년에 걸친 저널리즘과 연구로 훈련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였다. 영국 망명 시절부터 그는 《저스티스》 《노이에 차이트》 《프로스베셰니예》 등 유럽 사회민주주의 언론에 제국주의와 국제관계를 분석하는 글을 발표했고, 영국 주요 일간지(《맨체스터 가디언》 《트리뷴》 《데일리 뉴스》)에도 기고하며 국제 문제 전문가로 자리 잡았다. 그의 첫 단행본 《영국 산업의 쇠퇴》(1903)와 《이집트의 파멸》(1910)은 영국 제국주의를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해부한 초기 작업이며, 노동운동사 연구 《차티즘에서 노동주의로》(1929)는 오늘날까지 인용되는 고전이다.
소비에트 러시아 귀국 직후인 1920년 말, 로트시테인은 레닌의 제안으로 대학 사회과학 교육의 근본적 개혁을 위한 '로트시테인 위원회'를 이끌었고, 그 결과 1921년 2월 붉은교수양성소(Institute of Red Professors)가 설립되었다. 1924년에는 공산주의 아카데미 산하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IMKhMP)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여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순환과 위기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소비에트 학문의 토대를 놓았다. 이 연구소는 이후 스탈린, 몰로토프, 리트비노프 등 최고 지도부에 비공개 분석 보고서를 제공하는 소련 대외정책의 핵심 두뇌집단으로 성장했으며, 로트시테인의 후임 소장 예브게니 바르가 아래 1947년 폐쇄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로트시테인은 1927년부터 1945년까지 《대소비에트백과사전》 제1판 주필진을 지냈고, 외무인민위원부 기관지 《메주두나로드나야 지즌》(국제생활)의 책임편집자로 1923년부터 1930년까지 활동했다. 그가 기획·편집한 '국제정치문고' 시리즈는 서방 학자와 외교관들의 저작을 러시아어로 번역 출간하면서 그의 비판적 서문을 덧붙여 소비에트 독자들에게 제국주의 시대 국제관계의 실증적 자료를 제공했다. 1939년 1월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에 선출되어 역사학자로서 최고의 학문적 인정을 받았다. 사후 출간된 《19세기 말의 국제관계》(1960)는 그의 평생에 걸친 연구를 집대성한 유작이다.
1921년 소비에트-이란 우호조약
로트시테인의 가장 중요한 외교적 업적은 1921년 2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체결된 RSFSR-페르시아 우호조약의 준비와 서명이었다. 초대 주페르시아 전권대표(1921–1923)로서 그는 차르 제국이 페르시아로부터 강탈했던 모든 특권(회계대부은행, 철도 부설권, 카스피해 어업권, 치외법권)을 소비에트 러시아가 조건 없이 포기하도록 했다. 이는 제국주의 열강과 소비에트 국가의 대외정책을 가르는 분수령이었고, 1828년 투르크만차이 조약을 포함한 모든 불평등조약을 폐기했다. 조약은 카스피해에서 양국의 평등한 항행권을 보장했고, RSFSR이 페르시아 영토 내 반혁명 세력의 활동을 우려해 삽입한 5조와 6조(소비에트군의 일시 진주권)는 이후 수십 년간 양국 관계의 쟁점이 되었다. 로트시테인은 1931년 12월에도 이 조항들이 '전복된 체제의 지지자들이 무력으로 페르시아 영토 일부를 장악하는 경우'에만 적용된다는 공한을 직접 전달하며 페르시아 측의 우려를 완화하려 했다. 이 조약은 식민지-반식민지 세계를 향한 초기 소비에트 외교의 방향을 보여준 이정표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