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민테른 흑인국장에서 범아프리카 독립운동의 설계자로, 제국 질서와 결별한 혁명적 저널리스트
「판-아프리카주의냐 공산주의냐?」 — 냉전의 이분법을 거부하며, 아프리카 해방은 그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 마지막 저작의 제목
트리니다드 출신 범아프리카주의 이론가이자 저널리스트. 1929년 모스크바에서 프로핀테른 흑인국장으로 임명되어 식민지 노동자 조직화를 이끌었으나, 소련이 식민지 해방보다 열강 외교를 우선하자 1934년 결별했다. 런던에서 국제아프리카서비스국(IASB)을 이끌며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를 조직, 전후 탈식민화 의제를 설정했다. 콰메 은크루마의 최측근 조언자로서 가나 독립과 아프리카 연합 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경력 연표
- 1903트리니다드 아로우카에서 출생 — 본명 맬컴 아이번 메러디스 너스
- 1924–1927미국 유학, 피스크·하워드 대학 — CPUSA 입당(1927)
- 1929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에 보고 — 프로핀테른 흑인국장 임명, 모스크바 시소비에트 대의원
- 1930함부르크에서 흑인노동자국제노동조합위원회(ITUCNW) 조직, 월간 『니그로 워커』 편집
- 1933–1934나치 집권 후 추방 — 소련의 식민지 정책 전환에 반발하여 코민테른과 결별, 1934년 제명
- 1934–1945런던 정착 — IASB 의장,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 조직
- 1947–1957은크루마의 조언자, 『가나 혁명』(1953) 출간 — 가나 독립운동 지원
- 1957–1959가나로 이주, 은크루마의 아프리카문제 고문 — 1959년 런던에서 사망, 유해는 가나 크리스천스보르 성에 안장
코민테른과의 결별, 그리고 런던 범아프리카 네트워크
1933년 나치 집권 직후 함부르크의 ITUCNW 사무실이 급습당하고 패드모어는 독일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균열은 정치적 성격의 것이었다. 1934년 소련이 파시스트 독일·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프랑스 등 식민 제국과의 외교적 접근을 모색하면서, 식민지 해방은 코민테른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패드모어에게 이는 배신이었다. 1934년 2월 23일 코민테른 국제통제위원회(ICC)는 그를 제명했고, 미국 공산당 기관지는 그를 '제국주의의 하수인'으로 낙인찍었다.
1935년 런던에 정착한 패드모어는 소년기 친구 C.L.R. 제임스, 자메이카 범아프리카주의자 에이미 애시우드 가비, 케냐의 조모 케냐타, 시에라리온 노동운동가 I.T.A. 월리스-존슨 등과 함께 1937년 국제아프리카서비스국(IASB)을 설립했다. IASB는 하이드파크 집회, 노동조합·의회 로비, 기관지 『International African Opinion』 발행을 통해 영국 대중에게 식민지 문제를 환기시켰다. 식민 당국은 이 출판물을 금지했고, 특별수사대(Special Branch)는 회원 전원을 감시했다. 1938년 패드모어가 기초한 「전쟁 반대 선언」은 아프리카·카리브 식민지 민중에게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거부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백인 노동자에게도 반전 연대를 호소했다. IASB는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의 조직적 토대가 되었고, W.E.B. 듀보이스는 패드모어를 '대회의 조직 영혼'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