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시안토스

Γιώργης Σιάντος
그리스 공산당 공산주의 그리스 그리스계 아로마니아인 1890–1947 ○ 자연사

저항운동의 승리와 협상의 패배를 함께 짊어진 KKE 지도자

그를 '영국의 요원'으로 여긴 자하리아디스는 1946년 '어떤 경우에도 시안토스를 내 뒤에 남겨두고 싶지 않다'며 자신의 해외 탈출을 미뤘다.

담배 노동자 출신의 노동운동가 조지 시안토스는 그리스 공산당(KKE)의 핵심 지도자로 성장했다. 독일 점령기에 니콜라오스 자하리아디스가 다하우로 이송되자 당의 직무대행 서기를 맡아 KKE와 민족해방전선(EAM),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의 저항을 이끌었다. 그는 1944년 12월 무장충돌에서 EAM군을 지휘했고, 무장부대 해산에 반대하면서도 결국 협상 노선을 택했다. 1945년 바르키자 협정에서 EAM 대표단을 이끌고 서명했지만, 협정의 무장해제 조항은 뒤이은 백색 테러와 새로운 내전 국면 속에서 EAM의 정치적 패배로 남았다.

다른 이름: 게오르기오스 시안토스 · 요르기스 시안토스 · 게로스 · 테이오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패배의 책임과 사후 평가

바르키자 협정 서명은 시안토스 개인의 실책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리스어 원문은 그와 KKE 지도부가 1944년 12월 무장충돌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거나, ELAS 총사령부가 바랐던 충돌의 전면화를 의도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동시에 그는 바르키자 협정에 대해 유화적이었고, EAM 대표단 3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서명했다. 협정 이후 백색 테러가 폭력적으로 분출하자 EAM·KKE 측 정치적 처리의 실패는 시안토스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1945년 5월 자하리아디스가 다하우에서 귀환하면서 병들어 있던 시안토스는 점차 당내에서 밀려났다. 그는 형식상 정치국 위원으로 남았지만 당에 대한 영향력이 없었고, 1944년의 패배가 당내 평판에 오점으로 남았다. 1947년 5월 20일 아테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그리스어 원문은 페트로스 코칼리스의 병원에서, 영어 원문은 코칼리스의 개인 주택에서라고 각각 기록한다.

그러나 그의 장례는 EAM 계열 대중이 새 처벌 체제에 반대를 표명한 마지막 대규모 시위의 계기가 되었다. 1957년, 자하리아디스가 축출된 뒤 KKE 중앙위원회의 특별 부서가 그를 명예 회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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