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스트로이카 인사교체의 설계자, 마지막 생존 정치국원
1989년 1월, 빌뉴스 시당은 보고선거 비판에 대한 답변을 두 번째로 요구했으나 라주몹스키의 답변은 없었고, 그해 12월 리투아니아 공산당은 독자노선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1985~1988)과 당건설간부정책위원회 위원장(1988~1990)을 맡아 페레스트로이카 최대 규모의 간부 교체를 주도한 당 조직·인사 책임자였다. 농학자 출신으로 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제1서기(1983~1985)를 거쳐 1986년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에 발탁되었다. 당내 민주화를 내세운 고르바초프 아래에서, 라주몹스키가 중앙에서 내려보낸 엄격한 대의원 할당은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반발과 분리 독립을 촉발한 연쇄 요인이 되었다. 상하이 총영사(1990~1992)를 지냈고, 2025년 현재 1986년 정치국원 중 유일한 생존자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59–1961 사회운동·조직 · 소련 · 당 서기국 · 조직인사
경력 연표
- 1958쿠반농업대학 졸업, 콜호스 농학자
- 1959–1961콤소몰 구역위 제1서기
- 1964–1967코레놉스크 구역당 제1서기
- 1967–1971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조직당사업부장
- 1971–1973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문장
- 1973–1981크라스노다르 지방집행위원회 의장
- 1981–1983소련 각료회의 사무국 농업부장
- 1983–1985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제1서기
- 1985–1988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리가초프 후임)
- 1986–1990중앙위 서기
- 1988중앙위 당건설간부사업부장
- 1988–1990당건설간부정책위원회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 1990–1992주상하이 소련 총영사
소련 정치국
- 후보위원 1988.02–1990.07
1990.07 미재선
관련 역사 사건
1988년 제19차 당협의회 대의원 선정과 리투아니아의 반발
1988년 소집된 제19차 전연방 당협의회는 1941년 이후 처음 열린 당협의회였다. 라주몹스키는 조직당사업부장으로서 이 회의의 대의원 선출 준비와 회의 실무를 맡은 당 기구의 책임자였다.
모스크바로 파견될 리투아니아 대의원단은 빌뉴스에서 공개적인 논란의 대상이었다. 1988년 7월 9일에는 사유디스가 빙기스 공원에 10만 명 이상을 모아 모스크바의 협의회에서 돌아온 대의원들을 맞았다. 대의원 명부가 중앙에서 짜여 내려왔다는 불만은 이 무렵부터 리투아니아에서 공개적으로 터져 나왔다.
1990년 7월 제28차 당대회에서는 대의원 선출 규정이 다시 바뀌어, 상급 당기관이 대의원 정원의 약 10%를 자기 명부로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이 조치는 당시 진행 중이던 지구·시 단위 경선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리투아니아에서 이런 실무 관행은 최악의 시기에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1989년 1월 빌뉴스 시 당 조직은 중앙 조직당사업부에 대의원 할당과 선거 경과에 대한 비판을 담은 서한을 보내고 답신을 요구했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 20일 리투아니아 공산당 제20차 대회는 대의원 1,033명 중 855명의 찬성으로 당이 「자체 강령과 규칙을 가진 독립적인 정치조직」임을 선언하고 소련 공산당과의 관계를 끊었다. 리투아니아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과 결별한 첫 공화국 당이 되었다.
조직당사업부에서 올라와 리투아니아 문제를 계속 취급해 온 관료가 그해 상하이 총영사라는 변방으로 밀려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라주몹스키는 1990년 7월 제28차 당대회에서 중앙위 서기와 정치국 후보위원 자리를 함께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