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리 아르테모비치 아루티노프

Григорий Артемьевич Арутинов
소련 그루지야 1900–1957 ○ 심장마비

16년간 스탈린 시대 아르메니아를 이끌며 산업 건설과 문화 부흥을 주도한 '그리고리 건설자'

요양 제안을 거절하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치료받으면 우리 제르무크는 누가 짓나?' 진흙 속을 걸으며 직접 부지를 정한 끝에 제르무크는 아르메니아 대표 온천도시가 되었다.

1937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발탁돼 16년간 공화국을 이끌며 중공업·도시계획과 '다비드 사순스키' 서사시 기념 등 문화 부흥을 주도했다. 1953년 해임 후 국영농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문화적 국가 건설과 대숙청 속 지식인 보호

아루티노프는 아르메니아어조차 모르는 그루지야 출신 아르메니아인으로 1937년 공화국에 부임했지만, 16년간 아르메니아 문화 부흥의 핵심 후원자가 되었다. 부임 직후 그가 추진한 첫 대규모 사업은 민족 서사시 「다비드 사순스키」의 천 년 기념 행사였으며, 1939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아르메니아 예술 10일간(데카다)은 대성공을 거두어 소련 전역에 아르메니아가 '고급 문화의 나라'로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루티노프는 아람 하차투리안에게 발레 작곡을 의뢰하고, 알투냔의 민요합창단·사하캰의 구산 악단·코미타스 4중주단·아이바잔의 재즈 오케스트라를 창설했으며, 60인 규모의 국립 교향악단도 그의 결정으로 출범했다.

그러나 대숙청이 절정이던 시절, 그의 진정한 시험대는 문화계 인사들을 NKVD로부터 지켜내는 일이었다. 내무인민위원 호보로스탼이 망명 시절 다슈나크 계열 활동을 이유로 시인 아베티크 이사햐컨의 체포를 압박하자, 아루티노프는 "이사햐컨이 소비에트 아르메니아로 귀환한 사실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느냐"며 거부했고, 화가 마르티로스 사리안도 같은 방식으로 보호했다. 후일 이사햐컨은 아루티노프가 지어준 바그라먄 거리의 저택에 살며 그에게 '그리고리 건설자(그리샤-시나라르)'라는 별명을 붙였다. 에치미아진 대성당 폐쇄 문제에서도 그는 "국제적 무게를 지닌 문제"라며 모스크바 승인을 요구해 시간을 벌었고, 결국 스탈린과의 통화에서 교묘하게 철회를 이끌어내 수도원을 살렸다.

전시인 1943년에는 스탈린의 승인 아래 아르메니아 과학아카데미 설립을 주도했고, 초대 원장으로 이오시프 오르벨리를, 부원장으로 빅토르 암바르추먄을 영입했다. 예레반의 마테나다란 고문서연구소 건설 구상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아루티노프의 시대는 한 인물이 스탈린 체제의 충실한 집행자이자 동시에 민족 문화의 보호자라는 모순된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었던 소비에트 말기의 독특한 순간이었다.

문화 부흥: 서사시 1000주년과 모스크바 예술 축전

아루티노프는 아르메니아에 도착하자마자 민족 서사시 《다비드 사순스키》(사순의 다비드) 1000주년 기념 사업에 착수했다. 1939년 여러 언어로 기념 출판물을 발간하고 예레반 역 광장에 대형 기마 동상을 세웠으며, 전국에서 저명한 문화예술 인사들을 초청해 대대적인 축전을 열었다. 같은 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아르메니아 예술 10일'(데카다)도 그의 주도로 준비되었다. 아람 하차투랸에게 발레 작곡을 제안했고, 루벤 시모노프, 멜리크-파샤예프 등 대표적 예술가들이 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그의 후원 아래 코미타스 4중주단, 구산 앙상블, 재즈 오케스트라 등이 창설되었고, 모스크바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대숙청 와중에도 아루티노프는 화가 마르티로스 사리얀과 시인 아베티크 이사키얀 등 주요 문화 인사들을 NKVD 체포로부터 보호했다. 그의 재임 기간에 아르메니아 과학아카데미(1943)와 마테나다란 필사본 연구소 건물이 설립되었고, 빅토르 암바르추먄 등 저명 학자들을 공화국으로 초청했다. 이 문화 부흥은 소련 체제 안에서 아르메니아 민족 정체성을 재구성한 독특한 사례로 평가된다.

← 카드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