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리 이바노비치 페트롭스키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Петровский
소련 우크라이나 1878–1958 ○ 자연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원수, 드니프로페트롭스크의 이름이 된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1915년 2월, 차르 법정은 페트롭스키에게 모든 권리 박탈과 투루한스크 종신 유형을 선고했다. 반전 연설을 한 노동자 의원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하리코프현 재단사의 아들로 열한 살부터 노동한 볼셰비키다. 국가두마 노동자 의원(1912)으로 반전 연설로 유형되었고, 10월 혁명 후 내무인민위원으로 체카 창설에 참여했다. 1919년부터 1938년까지 우크라이나 SSR 국가원수로 소련 창설 조약에 서명했고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냈다. 대숙청에서 살아남았으나 1939년 해임되어 혁명박물관 부관장으로 여생을 보냈다. 예카테리노슬라프는 1926년 그의 이름을 따 드네프로페트롭스크가 되어 2016년까지 유지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소련 창설과 '자치화' 논쟁 (1922)

1922년 소련 창설 과정에서 페트롭스키는 우크라이나를 대표하여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나, 그가 취한 입장은 우크라이나 공산당 내부에서도 깊은 균열을 드러냈다. 1922년 8월, 스탈린이 주도하는 '독립 공화국들과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РСФСР)의 관계에 관한 위원회'에 우크라이나 대표로 참여한 페트롭스키는 스탈린의 '자치화' 방안을 전폭 지지했다. 이 방안은 형식적으로 독립된 우크라이나·벨로루시·자카프카스 공화국들을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에 자치공화국으로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모스크바 지향적이었던 페트롭스키의 기본 입장과 일치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한 '독자적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루지야 공산당은 자치화안에 반대했고, 요양 중이던 레닌도 개입하여 스탈린의 방안을 비판하며 동등한 공화국들의 연방을 주장했다. 결국 1922년 12월 30일, 페트롭스키는 전(全)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 창설 조약에 서명했으며, 소련 중앙집행위원회의 4인 공동의장(우크라이나 대표)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헌법 제정 과정에서도 페트롭스키는 미콜라 스크리프니크, 올렉산드르 슘스키, 크리스티안 라콥스키 등이 주장한 연방제적(심지어 사실상 국가연합적) 방안에 맞서 중앙집권적 연방 구조를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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