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 로마노프

Григорий Васильевич Романов
소련 러시아 1923–2008 ↓ 강제은퇴 1985

레닌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마지막 한 걸음에서 멈춘 후계자

«아무도 고르바초프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다음 날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모든 일을 끝내 놓았다. 정치국 규칙이 요구하는 대로 우리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토록 빨랐다! 이미 그들 모두와 비밀리에 거래를 마친 것이다.» — 1985년 3월 체르넨코 사후 승계 과정을 회고하며.

레닌그라드 조선기술자 출신으로, 1970년부터 13년간 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를 지내며 대규모 주택 건설, 지하철 확장, 레닌그라드 원전 및 방조제 착공 등 도시 기반을 재편했다. 군수공업을 관장하는 중앙위 서기와 정치국 위원까지 올랐고,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 모두 그를 차기 서기장 후보로 주목했다. 1985년 체르넨코 사후 고르바초프와의 승계 경쟁에서 밀려난 것은 소련 말기 역사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로마노프의 레닌그라드: 13년의 도시 재편

1970년부터 1983년까지 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를 지낸 13년간, 로마노프는 도시의 물리적·산업적 기반을 근본적으로 재편했다. 대표적 성과는 대규모 주택 건설로, 1976~1980년 제10차 5개년 계획 기간에만 약 100만 명의 레닌그라드 시민이 새 아파트를 받았다. 로마노프 시기 '로모노솝스카야', '프리모르스카야', '우델나야' 등 19개 지하철역이 신설되었고, 1973년에는 레닌그라드 원자력발전소(소스노비보르) 1호기 착공에 들어갔다. 1978년 채택된 '레닌그라드 방호시설 건설에 관하여' 결정으로 핀란드만 방조제(댐)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이 프로젝트는 중단과 재개를 거쳐 2011년 완공되었다. 산업 부문에서는 50개 이상의 연구생산연합(NPO)이 설립되어 군수·조선·에너지 분야에서 연구-생산 통합 모델을 정착시켰다. 또한 도시 노동력 자립을 위해 직업기술학교(PTU) 네트워크를 대폭 확충하여 외지 '리미트치크' 유입을 줄이고자 했다. 문화 인프라로는 레닌그라드 스포츠·콘서트 복합단지, 청년궁전이 건립되었고, 1981년 소련 최초의 자유로운 록 음악 공간인 레닌그라드 록클럽이 문을 열었으며, 소련 최초의 록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10년간 무대에 올랐다. 이 모든 사업은 중앙 부처 중심의 모스크바와 달리, 지역 당 조직이 직접 도시 발전을 주도한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

1985년 승계 경쟁: 마지막 한 걸음에서 멈춘 후계자

로마노프는 정치국 최연소 위원 중 한 명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이미 차기 지도자로 주목받았다. 1972년 알렉세이 코시긴은 이탈리아 총리 안드레오티에게 "소련의 미래 정치에서 핵심 인물은 로마노프가 될 것"이라고 말했고, 브레즈네프 역시 프랑스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탱에게 로마노프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안드로포프는 1983년 로마노프를 모스크바로 불러올려 군수공업 담당 중앙위 서기에 임명하며 후계 구도를 더욱 분명히 했다.

그러나 1984년 2월 안드로포프 사망 직후, 정치국 내 최고 원로인 안드레이 그로미코의 중재로 타협 후보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총서기에 선출되었다. 이 선택은 로마노프와 고르바초프 모두에게 일시적 유예였으나, 병약한 체르넨코의 13개월 재임 기간 동안 고르바초프는 사실상 제2서기로서 정치국·서기국·중앙위를 주재하며 실무 장악력을 키웠다.

1985년 3월 10일 체르넨코 사망 당시, 로마노프는 리투아니아 팔랑가에서 휴가 중이었다. 그는 총서기 사망 소식을 10시간이나 늦게 통보받았고, 클라이페다에서 비행기를 구하지 못해 빌뉴스로 이동한 뒤 다음 날에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 사이 고르바초프는 그로미코의 지명을 받아 3월 11일 정치국 회의와 중앙위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총서기에 선출되었다. 로마노프는 훗날 "아무도 고르바초프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비밀리에 그들 모두와 거래를 끝낸 뒤였다"고 회고했다. 1985년 7월 1일, 고르바초프는 로마노프를 "건강상 이유"로 정치국에서 해임했다. 62세의 강제 은퇴였다.

퇴임 후 로마노프는 모스크바의 평범한 연금생활자로 지내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연방 공산당에 입당했고, 2008년 85세로 사망했다. 그의 정치적 패배는 단지 개인적 좌절이 아니라, 소련이 개혁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달리하게 된 제도적 분기점이었다.

패자의 몫, 은퇴 그리고 황실 식기 소문

1985년 3월 승계전에서 패한 로마노프의 퇴장은 신속했다. 그해 7월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정치국과 서기직에서 물러났다. 예순두 살, 정치국에서 가장 젊은 축에 들던 사람의 은퇴 사유로는 누구도 믿지 않는 문구였다. 고르바초프 체제가 정리한 첫 번째 거물이었다.

그의 이름에는 오랫동안 한 가지 소문이 따라다녔다. 1974년 딸의 결혼식에 예르미타시 박물관에서 예카테리나 2세의 황실 식기를 가져다 썼고 취한 하객들이 그것을 깨뜨렸다는 이야기다. 소문은 서방 언론과 소련의 입소문을 타고 사실처럼 굳어졌지만, 훗날 박물관과 여러 조사가 확인한 바로는 근거가 없었다. 결혼식은 소규모 가정 행사였고 식기는 반출된 적이 없었다. 로마노프 자신은 이를 자신을 겨냥한 조직적 중상으로 여겼고, 일부 연구자들은 승계전을 앞두고 경쟁자의 평판을 깎으려는 공작 혹은 서방발 역정보의 산물로 본다. 진원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은퇴 후 그는 연금 생활자로 조용히 살았고 인터뷰를 거의 거부했다. 2008년 죽을 때까지 그는 자신이 소련을 지킬 수 있었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역사가들은 대체로 회의적이지만, 「로마노프의 소련」이라는 가정은 대체역사가들이 즐겨 찾는 소재로 남았다.

← 카드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