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피줄라 아민

حفیظ‌الله امین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1929–1979 ✕ 살해

4월 혁명을 설계하고 3개월 만에 소련군의 총구 앞에 쓰러진 칼크파 실세

아민이 부관에게 소련군에 경고하라 명하자 부관은 '쏘는 쪽이 소련군입니다'라고 답했다. 아민은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외쳤다. '거짓말이다, 그럴 리 없어!'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 칼크파의 실질적 2인자이자 1978년 4월 혁명의 군사적 설계자. 미국 유학 시절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후 귀국하여 당내 군부 조직책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부수상·외무장관·국방장관을 거치며 타라키를 제치고 실권을 장악했다. 1979년 9월 타라키를 축출·처형하고 당과 국가의 최고직에 올랐으나, 가혹한 숙청과 반란 확산 속에 소련은 그를 통제 불능으로 판단했다. 12월 27일 KGB 특수부대의 타지베크 궁전 습격으로 살해되었고, 이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서막이 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농촌 개혁과 헤라트 봉기

1978년 12월부터 1979년 초까지 아민과 타라키 정부는 농촌 개혁을 밀어붙였다. 제6호 포고령은 농민의 지주·부농에 대한 채무를 없앴고, 제8호 포고령은 토지 소유 상한을 토질에 따라 6~60헥타르로 정했다. 정부는 첫 집권 연도에 13만 2천 가구에 82만 2,500에이커를 분배했다고 발표했으며, 1979년 8월에는 수혜 가구가 30만으로 늘었다고 주장했다. 프레드 핼리데이는 이 수치가 공식 발표였고 개혁의 즉각적 효과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개혁은 농촌의 토지 소유와 채무 관계를 바꾸려 했지만, 현지의 토지 관습과 부족 관계에 대한 조사 없이 당원과 군인이 마을에 들어가 지시하는 방식으로 집행되었다. 토지 재분배는 종자·물·농기구를 제공하던 지주와 농민 사이의 기존 연결도 끊었고, 정부는 이를 대신할 지원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이에 따라 개혁으로 토지를 얻은 농민도 당장 생산상의 이익을 얻기 어려웠고, 지주와 부족 지도자들은 중앙 정부에 대한 반감을 폭넓게 조직할 수 있었다. 이 정책은 농촌 빈민을 혁명 정부의 지지자로 만들려는 목표와 달리 농촌의 저항을 키웠다.

1979년 3월 15일 헤라트에서 봉기가 일어나 여러 반정부 집단과 주민들이 도시를 장악했고, 반란은 군부대 일부의 이탈과 합류로 확대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애널리스트 네트워크의 재구성에 따르면, 정부군은 칸다하르에서 전차를 보내고 신단드 기지에서 아프간 조종사가 조종한 Il-28기로 폭격해 봉기를 진압했다. 봉기 진압과 뒤이은 정보기관의 검거에서 2만 4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해당 글은 이를 이스마일 칸 등의 주장으로 귀속하고 규모와 관련 사안에 이견이 있음을 설명한다. 헤라트 봉기는 아민 정부의 농촌 개혁과 강압적 집행을 둘러싼 갈등이 무장 저항과 정부의 군사적 대응으로 이어진 국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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