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예파야 쿠데타를 이끌고 리가에서 전사한 발트 향토방위군 돌격대장
쿠를란트의 발트 독일계 남작으로 1차 대전에서 바이에른군 창기병 장교로 싸웠고, 1919년 발트 향토방위군의 참모 장교 겸 돌격대장이 되었다. 4월 16일 리예파야에서 울마니스 정부를 뒤엎는 쿠데타를 이끌었고, 5월 22일 붉은 군대에서 리가를 탈환하는 공격 중 스물다섯 살에 전사했다.
관련 역사 사건
1919년: 리예파야의 쿠데타에서 리가의 죽음까지
한스 폰 만토이펠-쇠게는 1894년 1월 19일 쿠를란트의 캅세덴 영지에서 발트 독일계 귀족 게오르크 폰 만토이펠-쇠게와 조피 폰 뤼디거 백작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학생조합 작소-보루시아에 속했고, 1차 대전이 나자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면서도 바이에른군 제2창기병연대에 자원해 서부와 동부 전선에서 싸웠으며 1915년 소위가 되었다. 독일의 11월 혁명 뒤 쿠를란트로 돌아와 1919년 초 발트 독일계 지주층이 조직한 발트 향토방위군에 제1참모장교로 들어갔고, 참전 경험자를 모은 돌격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향토방위군은 울마니스의 라트비아 임시정부를 형식상 지키고 있었지만, 독일계 병사들은 토지개혁을 약속하는 라트비아 국가에 복무할 뜻이 없었다. 1919년 4월 16일 만토이펠의 돌격대는 리예파야에서 정부를 급습해 각료들을 체포하려 했다. 울마니스는 영국 함정의 보호 아래 배 「사라토프」로 피신했다. 쿠데타는 연합국 사절단도, 폰 데어 골츠의 독일군 사령부도 공식적으로는 지지하지 않았지만, 골츠는 이를 묵인했고 5월 10일 목사 안드리에우스 니에드라의 친독 정부가 세워졌다. 5월 22일 향토방위군과 철사단은 붉은 군대에서 리가를 탈환했다. 만토이펠은 다우가바 강 다리를 건너 시내로 들어가는 선두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스물다섯 살이었다.
발트 독일계 사이에서 그는 「가장 유능한 정치·군사 지도자」로 기억되었고, 그의 이름은 향토방위군 돌격대의 기념 훈장과 바이에른 슐리어제의 발트 전몰자 기념비에 남았다. 라트비아의 서술에서 그는 신생 공화국을 무너뜨리려 한 쿠데타의 주역이다. 리가 탈환 뒤 며칠 동안 이어진 처형과 보복, 6월 체시스에서 향토방위군이 에스토니아군에 패한 뒤 울마니스가 복귀한 경위는 「발트 독립전쟁」 문서에서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