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이 직접 승인한 영국 공산당 총비서, 4반세기 동안 당을 이끌다
1920년 5월 10일, 런던 항구. 폴릿은 부두 노동자들을 설득해 폴란드로 향하던 무기 수송선 SS 졸리 조지호의 군수품 선적을 막아냈다. 배는 무기를 내린 채 출항했다.
영국 공산당(CPGB) 창립 당원이자 25년 넘게 총비서를 지낸 영국 공산주의의 중심 인물. 1920년 런던 항만 노동자들을 설득해 폴란드로 향하는 군수품 선적을 저지하며 'Hands Off Russia' 운동의 얼굴이 되었다. 스탈린의 개인적 승인으로 총비서에 올라 당의 '코드 홀더'로서 모스크바와 직접 비밀 무선 연락을 유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을 지원했고, 전후 평화적 의회주의 노선을 담은 《영국의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공동 집필했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에도 거실의 스탈린 초상화를 끝내 떼지 않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9–1960 정치·당 지도 · 영국 공산당
경력 연표
- 1920CPGB 창립 당원
- 1924–1929전국소수민족운동(NMM) · 프로핀테른 영국국 사무총장
- 1929–1939CPGB 총비서 (1기)
- 1939–1941반전 노선 거부로 총비서직 해임 · 정치국원 잔류
- 1941–1956CPGB 총비서 (2기)
- 1956–1960CPGB 의장
관련 역사 사건
1939~1941년 전쟁 노선 파열과 총비서직 상실
1939년 9월 영국이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하자 폴릿은 독소불가침조약에도 불구하고 이를 환영했다. 그는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에서 '두 전선에서의 투쟁', 즉 '히틀러의 군사적 패배와 체임벌린의 정치적 패배'를 주장했으나, 재무장 문제에 대해서는 유보적이었다. 이 입장은 모스크바가 9월 14일 통보하고 코민테른 영국 대표가 9월 24일 재확인한 코민테른 노선과 어긋났다. 후임 총비서가 될 라자니 팔메 두트는 이미 그렇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폴릿은 총비서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같은 해 11월까지 자신의 지지 입장을 철회하며 그로 인해 '계급적 적의 손아귀에 놀아났다'고 말했다.
이후 1940~41년 당은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혁명적 패배주의' 노선을 따랐는데, 이는 나치 독일에 대한 영국의 신속한 패배가 당의 목표를 앞당긴다고 가정한 전략이었다. 폴릿은 이 시기에 체임벌린 정부의 전쟁 정책을 비판하며, 그것이 '히틀러의 파시즘'에 맞선 전쟁을 이용해 '그와 같은 파시즘의 여러 측면을 노동자들에게 강요'하려 한다고 보았다. 모스크바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지시로 폴릿은 해임된 뒤에도 6인 정치국에 남았다가,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뒤 다시 당 지도자로 복귀했다. 이 복귀 역시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고, 모스크바는 처칠 정부 비판으로 일관하던 두트의 전임 노선을 뒤집고 처칠 정부에 대한 전면 지원과 반사회주의 여론 자극 회피라는 폴릿의 노선을 받아들였다. 다만 디미트로프는 1942년 영국 정보기관의 당 침투를 용인했다는 폴릿의 '기이한 행태'를 두고, 그것이 의도적인지 '영국 정보부가 그의 부주의를 이용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며 그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1939~41년의 반전 노선은 훗날 노동당 가입 신청을 거부하는 근거로도 쓰였다. 노동당의 J. S. 미들턴은 당의 대소련 예속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이 시기의 반전 입장을 거부 사유로 들었다. 코민테른이 1943년 5월 해산되자 폴릿은 그 기회를 이용해 다시 노동당 가입을 신청했으나,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 반대했던 전력을 다시 들어 이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