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판콜

Henri van Kol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사회주의 식민 정책」을 주장한 네덜란드 사회민주노동자당의 식민 문제 대변인

네덜란드의 기술자·정치가. 델프트에서 수리공학을 공부하며 사회주의에 끌렸고, 1876년 자바로 건너가 기술자로 일하며 제1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1894년 사회민주노동자당을 세운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로, 1897~1909년 하원 의원으로 당의 식민 문제 대변인을 맡았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 국제사회주의자대회 식민 문제 위원회 의장으로 사회주의 식민 정책을 내세웠으나, 정작 자신은 자바의 커피 농장 지분을 숨기고 있었다.

다른 이름: 헨드리퀴스 휘베르튀스 판콜 · 리엔치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사회주의 식민 정책」과 그 모순

판콜은 델프트 시절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인민국가》와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었고, 1872년 헤이그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마르크스 가족의 안내와 통역을 맡았다. 1876년 자바로 건너가 수리 기술자로 일하면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첫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1887년 도멜라 니우엔하위스에게 돈을 빌려 함께 카유마스 커피 농장을 샀고, 그 수익으로 유럽에 돌아와 노동운동에 많은 돈을 냈다. 그러나 헤이그에서 「가난한 자바 사람들」을 착취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던 그가 농장의 가난한 노동자들에게서 이익을 얻고 있었고, 그는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1897년 엔스헤더 선거구에서 하원에 들어간 그는 사회민주노동자당의 식민 문제 대변인이 되었다. 1901~1902년 동인도를 여행했고, 교사가 되려던 카르티니의 장학금 청원을 도왔다. 1903년 낸 여행기 『우리 식민지에서』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자애롭게 이끌어야 할」 사람들로 그린 가부장적 시각과 조잡한 인종적 고정관념을 드러냈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 국제사회주의자대회에서 판콜은 식민 문제 위원회 의장이자 보고자로 뽑혔다. 위원회 다수안은 식민지의 이익이 과장되었다고 하면서도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문명화 작용을 할 수 있는 식민 정책」을 원칙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 판콜은 보고에서 위원회 다수가 순전히 부정적인 입장을 버리고 사회주의 식민 정책을 요구했다고 설명했고,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에두아르트 다비트가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게오르크 레데부어 등이 서명한 소수파 수정안이 카를 카우츠키의 지지를 받아 127대 108로 통과되어, 다수안의 첫 문단은 모든 식민 정책에 대한 원칙적 거부로 바뀌었다. 판콜은 1913년 사회민주노동자당의 정부 참여를 지지했지만 당은 이를 거부했고, 1925년 벨기에에서 사고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