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이민을 통상 지위와 묶어 데탕트를 흔든 민주당 매파 상원의원
미국민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데탕트', 곧 사람과 사상의 자유로운 이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이민자의 아들로 워싱턴주에서 태어나 40년 넘게 의회에서 활동한 냉전 자유주의자였다. 민권과 환경 정책에는 앞장섰지만 데탕트에는 회의적이어서, 소련의 유대인 이민을 통상 지위와 연결한 잭슨-배닉 수정안을 주도했다. 1974년 키신저·도브리닌과의 비공식 협상이 소련의 거부로 무산되며 잭슨은 1972년 통상협정을 사실상 좌초시킨 인물로 남았다. 그의 매파 보좌관들은 훗날 신보수주의의 핵심을 이루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1–1983 정치·당 지도 · 미국 국가기관
경력 연표
- 1938–1940스노호미시군 검사장
- 1941–1953연방 하원의원
- 1953–1983연방 상원의원
- 1963–1981내무·에너지·천연자원위원회 위원장
- 1972·1976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
- 1974잭슨-배닉 수정안 공동 발의
관련 역사 사건
국내 입법 기록과 그 논쟁적 유산
잭슨은 냉전 매파로 알려졌지만, 국내 정책에서는 진보적 입법 성과를 남겼다. 그는 1957년과 1964년 민권법을 지지했고 민권 운동기 의회 안에서 가장 강력한 민권 기록 가운데 하나를 가진 것으로 평가되었다. 1968년 마틴 루서 킹 주니어 암살에 대응해 불평등의 유산과 부정을 주제로 연설하기도 했다.
환경 분야에서 그는 국가환경정책법(NEPA)을 직접 발의했으며, 이 법은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환경법의 하나로 평가된다. 이 법은 환경 영향을 공개적으로 검토한다는 원칙을 세웠고, 이후 다른 주와 여러 나라가 유사한 입법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또한 알래스카와 하와이의 주 승격을 위한 투쟁을 이끈 인물이었다. 1963년부터 상원 내무·도서문제위원회(1977년 에너지·천연자원위원회로 개편) 위원장을 맡아 1981년까지 재직했고, 1970년대에는 석유 가격 통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다른 상원의원들과 함께 포드 행정부의 요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같은 시기 의회 지도부와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재보급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기록은 논쟁 없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역 주민들은 그가 추진한 요새 로턴 미사일방어(ABM) 기지 계획에 강하게 반발했고, 아메리칸 인디언 권리 활동가들은 요새 로턴 부지를 지역 부족에게 반환하지 않고 시애틀에 넘기려 한 계획에 반대해 농성을 벌였다. 타협안으로 부지 대부분은 디스커버리 파크가 되었고 20에이커가 연합 인디언 부족에게 임대되었다. 그는 방위산업과의 유착 때문에 '보잉의 상원의원'이라는 조롱을 들었고, 베트남 전쟁 지지로도 비판받았다. 사망 후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을 옹호하고 전후 태평양 연안 복귀를 막으려 한 점이 그의 흉상 설치 반대 근거로 제기되기도 했다. 즉 반제국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그는 국내 민권과 환경에서 일정한 성과를 냈으면서도 냉전 군사주의와 인종적 억압 정책에 가담한 모순적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