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근위전차여단을 이끌고 두 번 소련 영웅이 된 장군, 전후 국방부 인사총국장
모길료프현의 벨라루스인 농가에서 태어나 1928년 붉은 군대에 들어갔다. 1937년 쿨라크 출신을 숨겼다는 거짓 혐의로 출당·전역되었다가 1941년 복귀했다. 1943년 9월부터 종전까지 제112전차여단(10월 제44근위전차여단)을 이끌고 제1근위전차군에서 싸워 1944년과 1945년 두 번 소련 영웅이 되었고, 1945년 4월 베를린에서 중상을 입었다. 전후 발트 군관구 사령관, 1963~1970년 국방부 인사총국장을 지냈고 1968년 육군대장이 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8–1992
-
1931–1991
군사·지휘
경력 연표
- 1928.10붉은 군대 입대
- 1937.05거짓 혐의로 출당, 6월 전역
- 1941.04붉은 군대 복귀
- 1943.09.20–1945.05.09제112전차여단장(1943년 10월 제44근위전차여단)
- 1944.09.23소련 영웅
- 1945.04.06두 번째 소련 영웅
- 1959.11–1963.03발트 군관구 사령관
- 1963.03–1970.10국방부 인사총국장
- 1968.02.19육군대장
제44근위전차여단장, 그리고 카투코프 기념을 둘러싼 갈등
구사콥스키는 1943년 9월 20일 제112전차여단장이 되었고, 이 여단은 10월 근위 칭호를 받아 제44근위전차여단이 되었다. 여단은 게트만의 제11근위전차군단에 속해 카투코프의 제1근위전차군에서 싸웠다. 카투코프가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기자 유리 주코프에게 보낸 전선 편지에는 그의 이름이 거듭 나온다. 1944년 9월 1일 편지에서 카투코프는 구사콥스키가 소련 영웅 칭호에 추천되었다고 알렸고, 비스와-오데르 작전 중에는 그가 두 번째 영웅 칭호에 추천되었다고 썼다. 1945년 4월 7일 편지에서는 “구사콥스키는 훌륭하며 큰 기대를 걸게 한다”고 했다. 칭호는 1944년 9월 23일과 1945년 4월 6일에 내려졌다. 베를린을 점령한 뒤의 편지에서 카투코프는 그가 다쳐 석 달쯤 전열에서 빠지게 되었다고 전했는데, 그는 4월 27일 베를린 시가에서 중상을 입었다.
카투코바의 회고에 따르면 전쟁 중과 카투코프 생전에 두 집안은 서로 자주 오가며 가깝게 지냈다. 카투코프가 1976년 세상을 떠난 뒤 사이가 벌어졌다. 1978년 무렵 육군대장이자 제1근위전차군 참전 용사회 의장이던 구사콥스키를 병원에서 만난 저자는, 모스크바에 카투코프의 이름을 딴 거리나 기념판이 없으니 참전 용사회가 나서 달라고 청했다. 저자에 따르면 그는 1941년 모스크바 방어 때 카투코프는 “작은 사람”에 지나지 않았고 거리 이름은 최고위 지휘관에게만 붙인다며 거절했다. 저자는 그를 카투코프 기념에 반대한 장성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카투코바는 또 그가 국방부 인사총국장(1963~1970)이던 시절, 1941년 카투코프의 여단에서 싸우다 전사한 전차 에이스 드미트리 라브리넨코에게 사후 소련 영웅 칭호를 달라는 참전 용사들의 청원을 거절했다고 비판했다. 이는 저자의 주장이다. 라브리넨코는 1990년 5월 5일에야 소련 영웅으로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