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이오시포비치 쿠지민

Иосиф Иосифович Кузьмин
소련 러시아 1910–1996 ○ 자연사

흐루쇼프의 소브나르호스 개혁을 집행한 계획가

1957년 12월, 쿠지민은 전국 소브나르호스 의장들을 모스크바로 처음 소집했다. 그는 '공업의 대외시장 지향 개선'을 요구하며 1958년 2억 500만 루블 무역흑자 목표를 내걸었다.

전기공학자 출신 소련 계획가. 1957년 고스플란 의장으로 흐루쇼프의 소브나르호스 개혁(중앙부처 폐지와 지역경제회의 체제 전환)을 주도했으나, 개혁 혼선 속에 1959년 경질되었다.

경력 연표

공장 바닥에서 중앙위원회까지: 흐루쇼프의 계획가가 형성되기까지

이오시프 쿠지민은 아스트라한에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10대 시절 목공 견습공과 발전소 기름잡이·정비공으로 일했다. 1930년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에 입당한 그는 레닌그라드 군사전기기술아카데미에서 정규 전기공학 교육을 받고 1937년 모스크바 투광기 공장 기술부장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곧 공장 당위원회 서기로 선출되며 당 기구에 진입했고, 1939년에는 중앙당통제위원회(KPK) 책임통제관으로 발탁되어 쿠이비셰프 주의 전권위원을 겸했다.

1940년, 불과 30세의 나이에 KPK 부의장으로 승진한 쿠지민은 전쟁 기간 내내 당 규율과 간부 검증이라는 핵심 권력 기구에서 일했다. 1947년 각료회의 산하 농업·조달 담당 부로 이동하며 중앙 경제 행정의 실무를 익혔고, 1952년 CPSU 중앙위 산업운수부장으로 임명되어 연방 차원의 산업 정책 조정에 참여했다. 1956년에는 기계제조부장을 맡아 소비에트 경제의 기술적 중추를 관할했다.

이러한 경력은 하나의 패턴을 만든다. 쿠지민은 부문별 중앙부처 체제 안에서 성장한 인물이 아니라, 당 기구를 통해 부상한 통제·조정 전문가였다. 니콜라이 바이바코프처럼 석유人民委員部 출신의 부처 관료도, 알렉세이 코시긴처럼 경공업·재무 부처를 거친 행정가도 아니었다. 흐루쇼프가 1957년 5월 고스플란 의장으로 그를 선택한 것은 바로 이 이력 때문이었다. 부처를 옹호할 이해관계가 없는 당 기구 출신 기술관료가 부처 체제 자체를 해체하는 작업의 집행자가 된 것이다.

중앙위원회 산업 부서들: 부처 체제의 내부자, 해체의 설계자 (1952–1957)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는 스탈린의 마지막 당기구 재편의 일환으로 기계제조부·중공업부·운수부를 통합하여 단일한 '공업운수부'를 신설했다. 쿠지민은 1953년 이 방대한 부서의 장이 되었다. 1954년 6월, 흐루쇼프는 공업운수부를 기계제조부, 방위산업부, 소비재공업부, 건설부, 운수통신부, 중공업부의 6개 부문별 부서로 분할했다. 쿠지민은 이 중 기계제조부장으로 임명되어 소비에트 경제의 기술적 중추(공작기계, 자동차, 트랙터, 에너지 설비, 계측기기)를 총괄하게 되었다.

기계제조부는 단순한 당의 감독 기구가 아니었다. 산업 부처들이 작성한 생산 계획과 투자 안건을 사전 검토하고, 간부 임명을 실질적으로 통제했으며, 부처 간 분쟁을 중재했다. 쿠지민은 이 자리에서 25개 연방·연방-공화국 산업 부처 전체의 작동 방식을 내부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부처 간 할거주의(베돔스트베노스트), 중복 투자, 공급 체계의 비효율성을 그는 누구보다 가까이서 목격했다.

1956년 2월, 쿠지민은 중앙감사위원회(TSRK) 위원으로 선출되며 당 중앙 기구 내 입지를 확고히 했다. 이 무렵 그는 이미 흐루쇼프의 신뢰를 얻은 기술관료로 분류되었다. 그가 감독한 기계제조 부문은 민간 공업과 군수 산업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방위산업부가 군수 전담인 반면, 기계제조부는 민수 공장들이 생산하는 이중용도 장비(트랙터 공장이 탱크를, 자동차 공장이 장갑차를 생산하는 체계)의 민간 측을 관할했다. 이는 쿠지민이 소비에트 경제의 군-민 연계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게 된 배경이었다.

1957년 5월 흐루쇼프가 쿠지민을 고스플란 의장으로 선택했을 때,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5년간 중앙위원회 산업 부서장으로 일한 그는 부처 체제의 모든 결함을 알면서도 그 체제에 얽매이지 않은 유일한 고위 기술관료였다. 니콜라이 바이바코프가 석유 부처의 이해를, 알렉세이 코시긴이 재무·경공업 부처의 논리를 대변했다면, 쿠지민은 부처들 위에 군림하는 당 기구의 시선으로 산업 전체를 조망했다. 부처 체제를 해체하는 작업은 그 체제를 내부에서 가장 잘 알고 있던 사람에게 맡겨진 셈이었다.

1957년 소브나르호스 개혁과 고스플란

1957년 5월 10일, 흐루쇼프는 25개 연방·연방-공화국 산업부처를 폐지하고 전국에 105개 지역경제회의(소브나르호스)를 신설하는 법률에 서명했다. 같은 날 고스플란도 개편되었다. 기존의 국가경제위원회(고스에코놈코미시야)가 해체되고, 장기계획 기능과 현재계획 기능이 통합된 단일 국가계획위원회가 출범했다. 그 의장에 임명된 사람이 바로 이오시프 쿠지민이었다. 그는 니콜라이 바이바코프의 뒤를 이어 고스플란 의장이 되었고, 동시에 소련 제1부총리로 지명되었다.

쿠지민은 기존 고스플란 의장 바이바코프와 달리 흐루쇼프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인물로 평가되었다. 전기공학자 출신으로 당 중앙기관에서 산업·운수·기계제조 부문을 두루 거친 그는, 중앙 부처 체제의 옹호자가 아니라 새로운 체제의 설계자로 선택된 것이다.

1957년 12월 26-27일, 쿠지민은 전국 소브나르호스 의장들을 모스크바로 소집하여 고스플란 주관 첫 전국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단순한 계획 수치의 전달을 넘어 소브나르호스 체제 안에서 소련 경제의 질적 전환을 위한 구상을 제시했다. 특히 1957년 무역수지 적자를 극복하기 위해 '공업의 대외시장 지향 개선'을 직접 과제로 제시하며 1958년 중 2억 500만 루블의 흑자 전환을 목표로 내걸었다. 이는 수출 주도 성장이라는 발상을 소비에트 계획 실무에 접목한 이례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개혁은 첫해부터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소브나르호스들이 자기 지역 안에서 생산을 완결하려는 '지역주의(메스트니체스트보)' 경향이 나타났고, 지역 간 공급 체계는 혼란에 빠졌다. 1958년 5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쿠지민은 1분기 계획 실행 실적을 보고했지만, 개혁의 혼선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59년 3월 20일, 쿠지민은 고스플란 의장과 부총리직에서 해임되고 신설된 국가과학경제회의 의장으로 이동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개혁에 회의적이었던 알렉세이 코시긴이 임명되었다. 쿠지민의 고스플란 의장 재임 기간은 22개월에 불과했지만, 그 기간은 소비에트 계획사에서 중앙집권적 부처 체제를 해체하고 지역 기반 계획 체제로 전환한 유일한 실험이었다.

고스플란 이후: 몰락한 개혁가의 조용한 망명

1959년 3월 20일, 쿠지민은 고스플란 의장과 부총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그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았다. 쿠지민은 같은 날 신설된 국가과학경제회의(고스에코놈소베트)의 초대 의장 겸 소련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기관은 장기 전망 계획(1961~1980년 일반전망)의 작성을 담당했으나, 실질적인 통제 권한은 없었다. 고스플란 의장 시절 전국 소브나르호스 체제를 직접 지휘했던 그가 이제는 먼 미래의 수치를 정리하는 연구기관의 책임자로 옮겨진 것이다. 쿠지민은 이 자리에서 13개월을 버텼다.

1960년 6월, 쿠지민은 주스위스 소련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전직 제1부총리 출신의 대사 임명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베른에서 그는 1963년 2월까지 근무하며 무역·국제기구 관련 외교 실무를 다루었다. 모스크바로 소환된 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외교 경력이 그대로 연장되었다. 1963년부터 1972년까지 그는 소련 외무성 국제경제기구국에서 전문가, 전문가-자문관으로 일했다. 기술관료 출신 개혁가의 경력이 국제경제기구 전문가로 마무리된 것은, 그의 전문성이 계획에서 외교로 전환된 독특한 궤적을 보여준다.

1972년 연방급 개인연금 수급자로 은퇴한 쿠지민은 모스크바에서 조용한 노년을 보냈고, 1996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트로예쿠로보 묘지에 안장되었다. 한때 소비에트 계획 체제의 근간을 뒤흔든 개혁가의 최후는, 소련 체제가 실패한 개혁가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처형도, 완전한 추방도 아닌, 기구의 변방으로의 조용한 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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