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혁명적 수호주의의 설계자, '그런 정당이 있습니다'의 상대역
1917년 6월 4일, 제1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체레텔리가 "권력을 우리 손에 달라고 말하는 정당은 러시아에 없다"고 선언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레닌이 "그런 정당이 있습니다!"라고 응수했다.
그루지야 출신 멘셰비키 지도자. 1917년 혁명적 수호주의를 주창하고 임시정부 내무장관을 지냈다. 레닌의 유명한 '그런 정당이 있습니다!' 반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며, 10월혁명 후 그루지야 독립에 참여했다.
경력 연표
- 1900–1902모스크바대 법학부 입학, 학생운동 지도자로 체포·시베리아 유형
- 1903–1906RSDLP 입당, 멘셰비키파 합류. 주간지 『크발리』 주필. 베를린 수학 후 1906년 귀국
- 1907제2두마 의원(쿠타이시 현), 사회민주당 원내대표. 두마 해산 후 5년 강제노동형, 시베리아 유형
- 1915–1917.2시베리아 치머발트주의 주도, 『시베리아 잡지』 편집. 이르쿠츠크 혁명위원회 참여
- 1917.3–9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혁명적 수호주의 노선 주도
- 1917.5–8임시정부 체신장관(5~7월), 내무장관 겸임(7~8월)
- 1918–1921그루지야 독립선언 서명, 제헌의회 의원, 파리 강화회의 대표
- 1921–1959프랑스 망명, 제2인터내셔널 집행위원. 1940년 미국 이주, 1959년 뉴욕에서 사망
관련 역사 사건
혁명적 수호주의: 전쟁, 연립, 그리고 실패한 중도
1917년 3월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온 체레텔리는 단 일주일 만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실질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가 내건 '혁명적 수호주의'는 혁명과 국가를 동시에 지키려는 이중의 기획이었다. 독일 제국주의에 맞서 러시아를 방어해야 하지만, 그 전쟁은 무병합·무배상의 민주적 평화로 이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짐머발트 국제주의에서 출발했으나, 혁명 이후에는 방어를 혁명 그 자체의 근본 조건으로 격상시켰다.
체레텔리는 볼셰비키의 '혁명 패배주의'도, 밀류코프의 무제한 전쟁 수행도 아닌 제3의 길을 걸었다. 소비에트 회의에서 채택된 결의안은 '모든 인민의 생명력 있는 힘'을 결집하라고 호소했고, 이 원칙은 연립정부 참여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그는 소비에트의 압도적 지지를 배경으로 임시정부에 입각했으나, 정작 자신에게는 체신장관이라는 상징적 직책만을 맡고 소비에트에 머물며 양 기관 사이의 '연락 장교' 역할을 했다. 동시대인들은 그를 '소비에트 안의 정부 대표'이자 '정부 안의 소비에트 대표'라 불렀다.
그러나 이 전략은 근본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체레텔리는 사회주의 정당 단독 집권이 내전을 초래할 것이라고 믿었기에 부르주아 정당과의 연립을 고수했지만, 전쟁 지속과 토지 개혁 지연으로 대중의 인내심이 바닥날수록 그가 의지한 중도 연합 자체가 붕괴되어 갔다. 7월 위기 동안 그가 우크라이나 중앙 라다와의 타협안을 밀어붙이자 생도당 장관 전원이 사퇴했고, 그 자신도 내무장관으로서 질서 회복에 실패했다. 9월이 되자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다수파를 장악했고, 체레텔리는 크게 상심한 채 그루지야로 떠났다. 훗날 트로츠키는 "체레텔리가 혁명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혁명이 필요했다"고 평했고, 플레하노프는 "체레텔리와 그 친구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레닌의 길을 닦고 있었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