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론시타트 봉기를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최후'로 해석한 역사가
어느 날 오전 11시에 논쟁을 중단해야 했는데, 그가 다섯 시간 뒤 돌아와서는 연결하는 말 한마디 없이 바로 '일곱째로, 레닌은…' 하고 중단된 지점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베를린의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나치 시절 시베리아 금광촌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했고, 1971년 이후 히브리대학 교수로 러시아 혁명사를 연구했다. 마르토프 평전(1967)으로 멘셰비키 지도부의 전략적 선택을 조명했으며, 『크론시타트 1917-1921』(1983)에서는 페트로파블롭스크호와 세바스토폴호 승무원의 93.9%가 1917년 이전 입대자임을 함대 명부로 입증해 봉기 참여자들이 '농민 복장의 백위파'가 아니라 혁명의 구주역들이었음을 실증했다. 소련사에서 개인과 집단의 선택이 결정적이었다고 보았으며, 이스라엘에서는 정착촌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38나치에 의해 가족과 함께 폴란드로 추방
- 1941소련 당국에 의해 시베리아 금광촌으로 이주
- ~1945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
- ~1950s애들레이드 대학에서 역사학 학위 취득, 이후 교수 임용
- ~1960s스탠퍼드대학 후버연구소에서 기록연구
- 1967『마르토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의 정치적 평전』 출간
- 1971히브리대학 교수 취임
- 1983『크론시타트 1917-1921: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운명』 출간
- 2002『니콜라이 수하노프: 러시아 혁명의 기록자』 출간
관련 역사 사건
니콜라이 수하노프 평전과 멘셰비키 재판 연구
게츨러의 마지막 대작은 『니콜라이 수하노프: 러시아 혁명의 기록자』(2002)였다. 여기서 그는 마르토프 평전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소련에서도 망명지에서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어 서구에서도 잊혀 있었던 인물을 다시 역사 서술에 끌어들였다. 수하노프는 본명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기메르로서, 사회혁명당원에서 출발해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창립 구성원이 되었고 마르토프의 멘셰비키-인터내셔널리스트에 합류했던 혁명가·농업경제학자·언론인이었다. 게츨러는 그가 1917년의 소비에트 권력과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을 『노바야 지즈니』 지면에서 어떻게 전개했는지, 또 레닌이 그의 회고록을 병상에서까지 비판적으로 검토했을 만큼 그 기록이 권위를 가졌는지를 살폈다.
이 평전의 핵심은 1931년 3월의 이른바 '멘셰비키 재판'에 관한 분석이다. 게츨러는 재판의 출판 보고서와 예비 조사 기록을 검토하면서, 수하노프가 왜 공개 법정에서 자신과 동료들을 모함하는 자백을 했는지 따졌고, 가족에 대한 위협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수하노프는 일요일 저녁 차 모임이 반혁명 음모의 비밀 회합으로 둔갑하는 과정에서 기소의 핵심 고리로 쓰였다. 게츨러가 드러낸 것은 지적 용기와 정치적 타협이 한 인물 안에서 뒤섞인 모습이었다. 1928년 말 검열 강화에 반대해 목소리를 낸 것과 같은 해에 1917년을 볼셰비키화해 서술한 희곡을 출판한 일이 나란히 놓인다. 그는 수하노프를 '빛나지만 여러 면에서 비극적인 인물'로, 비극의 뿌리를 마르토프처럼 원칙을 지키지도, 이전 동지 비신스키처럼 완전히 버리지도 못한 그 모순에 두었다.
이 작업은 게츨러 자신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그가 복원하려 한 것은 도덕적 단죄의 대상이 아니라, 억압과 자기 부정 속에서 선택을 강요당한 개인의 궤적이었다. 수하노프는 1930년 체포되어 재판 뒤 시베리아 유배와 징역을 겪었고, 1937년 나치 독일을 위한 간첩이라는 날조된 혐의로 다시 기소되어 1940년 처형되었다. 이후 스탈린 사후 명예가 회복되었고 1992년에는 그에 대한 모든 혐의가 근거 없다고 선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