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라브 최초의 전선군 사령관, 바그라티온에서 발트까지
1944년 여름, 부대가 발트해에 닿자 바그라먄은 스탈린에게 발트해 물 한 병을 보냈다. 독일군이 해안을 되찾는 사이 병이 크렘린에 도착하자 스탈린은 말했다. "돌려주시오. 바그라먄 동무가 직접 따라 부을 수 있게."
아제르바이잔 출신 아르메니아인으로 비슬라브인 최초 소련 전선군 사령관.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습지 돌파로 독일 북부집단군을 쿠를란트에 고립시켰다. 소련원수, 두 번의 소련영웅.
경력 연표
- 1915–17러시아 제국군 자원입대, 캅카스 전선 페르시아 원정, 소위
- 1918–20아르메니아군에서 튀르크군과 교전, 중대장·기병대대장, 중위
- 1920–34붉은군대 합류, 기병연대장, 고급기병학교·프룬제 아카데미 졸업
- 1934–40키예프군관구 기병사단 참모장, 참모아카데미 졸업 후 교관
- 1941–42남서전선 작전참모 — 키예프 방어, 로스토프 반격, 하리코프 공세
- 1942–4316군·11근위군 사령관 — 지즈드라, 오룔 반격에서 독일 방어 돌파
- 1943–451발트전선군 사령관 — 바그라티온, 메멜, 쾨니히스베르크 함락
- 1945–55발트군관구 사령관, 소련원수, 국방차관
- 1956–68참모아카데미 원장, 국방차관 겸 후방총국장
관련 역사 사건
전후: 마지막 전선군 사령관에서 쿠바까지
전후 바그라먄은 발트군관구 사령관(1945~54), 국방차관(1955~56, 1958~68), 참모아카데미 원장(1956~58)을 역임하며 소련 군사 엘리트의 핵심으로 남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아나디리 작전'의 기획을 주도했다(소련군의 극비 쿠바 배치 계획으로, 작전명은 잠재적 적의 시선을 북쪽으로 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추코트카의 강 이름에서 따왔다). 1968년 이후 국방부 감찰총감으로 물러났으나 중앙위원과 최고회의 대의원으로서 공적 활동을 이어갔다.
아르메니아인으로서 바그라먄은 소비에트 체제 내에서 민족적 정체성과 제국적 충성 사이의 긴장을 평생 체현했다. 라트비아 최고회의 첫 회의에서 모든 발언이 라트비아어로 진행되자 그는 의도적으로 아르메니아어로 연설했고, 이후 회의는 모두가 이해하는 러시아어로 진행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82년 9월 사망했을 때 그는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전선군을 지휘했던 마지막 생존 원수였으며,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