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로그기노비치 고레미킨

Иван Логгинович Горемыкин
러시아 러시아 1839–1917 ✕ 강도에게 피살

무위(無爲)로 전제를 지켰다 믿은 제국 최후의 수석대신

"폐하께서는 제 관 주위에 이미 촛불이 켜졌고, 의식을 완료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저 자신뿐임을 보지 못하십니다." — 1914년 재소환된 74세 총리가 자신의 노쇠함에 대해 남긴 말.

제정 러시아 최후의 제1급 추밀고문이자 두 차례 총리를 지낸 평생 관료. 1906년 제1두마를 해산시키고, 1914년 74세에 다시 소환되어 전시 내각을 이끌었으나 무능과 두마 적대, 라스푸틴 일파에 대한 굴종으로 체제 붕괴의 상징이 되었다. 반의회적 전제 고수를 '신이 기름 부은 자'에 대한 충성이라 여겼고, 이 완고함이 바로 입헌 실험을 좌초시킨 능동적 요인이었다. 혁명 후 소치의 별장에서 강도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관료로서의 형성과 내무장관 시절 (1895–1899)

고레미킨은 노브고로드의 소귀족 집안 출신으로, 1860년 제국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원로원에서 관료 경력을 시작했다. 1864년 폴란드 입헌왕국으로 발령받아 농민 담당 위원(комиссар по крестьянским делам)으로 근무하면서 폴란드 농민 문제에 정통하게 되었고, 1869년에는 『폴란드 농민의 역사 개요』(Очерки истории крестьян в Польше)를 출간했다. 이후 프워츠크·키엘체 부지사를 거쳐 1873년부터 내무부 산하 폴란드 농민문제 위원회에서 근무했으며, 1884년 원로원 제2(농민)부 검사장, 1891년 법무차관을 역임하며 '법률가'로서의 평판을 쌓았다. 당대 관료 사회에서 그는 '법치'를 중시하고 행정적 자의(恣意)에 반대하는 인물로 인식되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제정의 틀 안에서의 합법성이었다.

1895년 10월 니콜라이 2세는 고레미킨을 내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새 황제는 그를 전제정에 충성스럽고 '안전한' 관료로 평가했다. 고레미킨은 알렉산드르 3세 시기 반동 정책의 연장선에서 '반대개혁'(контрреформы)을 충실히 이어갔으며, 러시아 사회가 기본적으로 안정적이며 '약간의 보완과 수리'만 필요하다고 황제에게 보고했다. 그의 재임 중 내무부는 이주국(Переселенческое управление, 1896)을 신설하여 시베리아 농민 이주를 제도화했고, 1896년 전러시아 인구총조사를 실시했으며, 토볼스크·톰스크·이르쿠츠크·예니세이스크 현에 농민 감독관 제도를 도입했다. 고레미킨은 또한 서부 및 변경 지역에 젬스트보(지방자치)를 확대하는 안을 추진했으나, 니콜라이 2세는 자유주의 확산을 우려하여 이를 거부했고 1899년 10월 고레미킨을 해임했다. 이후 그는 국무회의 의원으로 물러나 비테의 개혁 노선을 '국가의 근간을 훼손하는 것'이라 비판하며 보수적 대항마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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