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미하일로비치 그론스키

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Гро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85 ○ 자연사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말을 스탈린과 함께 만든 문학 정치위원

그론스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이렇게 정의했다: "렘브란트, 루벤스, 레핀을 노동계급에 봉사하게 하는 것."

차르 치하에서 혁명운동을 시작해 소비에트 문학 통제의 설계자 중 한 사람이 된 저널리스트이자 당 관료였다. 1928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2대 신문 《이즈베스티야》의 편집장을 지냈고, 1932년 5월 스탈린과의 대화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내 문학예술의 공식 교의로 정착시켰다. 같은 해 소비에트 작가동맹 조직위원회 의장을 맡아 고리키와 함께 문학연구소를 설립했으며, 《노비 미르》 편집장으로서 스탈린과 문단을 직접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1938년 체포되어 16년간 수용소와 유형 생활을 견뎠고, 1954년 복권된 뒤에도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그론스키와 클류예프 사건

그론스키는 문학 통제의 설계자였을 뿐 아니라, 개별 문인의 운명을 직접 좌우한 당 기능자이기도 했다. 그는 말년에 이 사안을 스스로 증언했다. 1959년 9월 30일 그가 남긴 회고에 따르면, 1932년 시인 니콜라이 클류예프가 모스크바의 한 성당 앞 계단에서 구걸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를 《이즈베스티야》 편집실로 불러들였다. 그론스키는 클류예프에게 학술 배급표와 5천 루블을 주며 협조를 요구했고, 클류예프가 거절하자 그의 시를 "이런 추악한 것"이라며 게재를 거부했다. 그론스키는 나아가 클류예프가 문학 청년들을 "부패"시킨다고 주장하며 내무인민위원 야고다에게 전화를 걸어 클류예프를 24시간 안에 모스크바에서 "체포가 아니라 추방"하도록 요구했고, 이 조치를 스탈린에게 보고해 승인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이 회고의 사실성과 순서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같은 기록의 주석은 클류예프 문제가 그론스키가 서술한 순서대로 전개되지 않았으며, 전직 편집장이 자신의 예방 조치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클류예프는 1934년 2월 2일 체포되었고, 1937년 10월 톰스크에서 처형되었다. 그 처형은 그론스키의 개인적 발언이 아니라 1937년 대테러 국면의 톰스크 내무인민위원회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그론스키는 이후에도 이 문제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1956년 제20차 당대회 이후 스탈린 시대에 희생된 작가들의 복권을 위해 나섰으면서도, 클류예프와 아베르바흐만은 복권을 도와주지 않았다. 사회주의 문학의 교의를 만든 사람이 한 시인의 추방을 스스로 기획하고, 그 시인의 사후 복권마저 거부한 이 대비는 문학 통제가 추상적 정책이 아니라 특정 인물의 개인적 선택을 통해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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