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이그나티예비치 야쿠봅스키

Иван Игнатьевич Якуб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2–1976 ○ 병사

바르샤바조약군을 9년간 지휘한 벨라루스계 원수

1941년 민스크 방어전에서 야쿠봅스키의 전차부대는 시가로 밀려든 독일 오토바이 부대를 전차로 들이받아 분쇄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의 여섯째로 태어나 1932년 적군에 입대해 1934년 민스크의 칼리닌 벨라루스 통합군사학교를 졸업했다. 독소전쟁 내내 전차부대를 지휘하며 민스크 방어전, 모길료프 방어전,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키예프 해방, 베를린·프라하 공세까지 싸워 소련영웅 칭호를 두 번 받았다. 1967년 국방 제1차관 겸 소련원수에 올라 바르샤바조약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군사 준비를 총괄했으나, 작전 개시 직전 현장 지휘권은 이반 파블롭스키에게 넘어갔다. 1976년 11월 30일 모스크바에서 병으로 사망해 유해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독일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과 1961년 베를린 위기

독일 주둔 소련군(GSVG)은 해외에 주둔한 소련군 가운데 가장 큰 작전·전략 병단으로, 냉전기 내내 뷘스도르프에 사령부를 두고 동독에서 소련의 이해를 대표하는 군사 기구였다. 이 병단은 1953년 동독 봉기를 진압하는 데 동원된 바 있으며, 1948~1949년, 1953년, 1961년의 베를린 위기마다 옛 반히틀러 연합국과 직접 맞섰다.

야쿠봅스키는 1957년 7월 GSVG 제1부사령관이 되었고 1958년 8월 18일 상장으로 진급했다. 1960년 4월 그는 GSVG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유럽에서 무력 충돌 위협이 급격히 고조된 1961년 베를린 위기 한복판에서 이 병단을 지휘했다.

위기가 절정에 이르자 1961년 8월 소련원수 이반 코네프가 GSVG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야쿠봅스키는 그의 제1부사령관으로 옮겨가면서도 병단의 일상적 작전을 계속 주관했다. 정세가 안정된 뒤인 1962년 4월 그는 GSVG 총사령관직에 복귀했다. 이로써 그는 이 직위를 두 차례 맡은 유일한 군인이 되었고, 1965년 1월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으로 전임하면서 독일에서의 지휘를 마감했다.

1961년 베를린 위기 당시 그가 지휘한 부대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동원된 것과 같은 전방 배치 병력이었다. 그의 독일 시대 지휘는 전시 전차 지휘관 경력과 1968년 침공 사이에 놓인 별개의 국면이며, 유럽 대치의 최전선에서 이 병단을 이끈 시기로 기록된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다뉴브 작전

야쿠봅스키는 1967년 7월 바르샤바조약 연합군 총사령관에 취임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군사 작전을 맞이했다. 1968년 4월 말,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내에서 바르샤바조약군의 훈련을 준비하기 위해 프라하를 방문했다. 이 방문은 알렉산데르 둡체크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개혁에 대해 소련 지도부가 군사적 선택지를 저울질하기 시작한 시점과 겹친다.

야쿠봅스키는 바르샤바조약군 총사령관으로서 「다뉴브 작전」의 군사적 준비를 실무적으로 총괄했다. 1968년 8월 20~21일 밤, 바르샤바조약 5개국(소련, 폴란드, 동독, 헝가리, 불가리아)의 병력 약 25만 명이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침공을 불과 며칠 앞두고 소련 지도부는 작전의 현장 지휘권을 야쿠봅스키에게서 육군 총사령관 이반 파블롭스키 대장에게로 넘겼다. 이는 바르샤바조약 연합군 사령부보다는 소련 국방부와 육군 참모본부가 작전 통제의 중심이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이었다.

야쿠봅스키는 침공 이후에도 1976년 사망할 때까지 바르샤바조약군 총사령관직을 유지하며 동유럽 군사동맹의 재편과 「정상화」 체제의 군사적 뒷받침을 주도했다. 1970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영웅 훈장을 받았으나, 그가 지휘한 침공은 바르샤바조약의 집단적 군사 개입이 동맹국 주권을 유린한 결정적 사례로 역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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