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철학 교사에서 우익 반대파로 전락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스탈린이 헤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자, 성미 급한 라트비아인 철학자 스텐은 크렘린 사무실에서 제자의 양복 옷깃을 붙잡고 흔들며 가르쳤다. 수업 후 친구에게 남긴 말: '코바는 10년 안에 드레퓌스와 베일리스 재판을 무색하게 만들 짓을 할 거야.'
라트비아 출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붉은교수양성소 1기 졸업 후 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을 개인교습하며 소비에트 철학 제도화의 중심에 섰다. 1928년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로 돌아선 뒤 1932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유배되었고, 잠시 복권되었으나 1937년 처형되었다.
경력 연표
- 1914라트비아에서 RSDLP 입당
- 1921–1924붉은교수양성소 철학과 1기 수학
- 1925–1928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 개인교습
- 1927–192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선전부 부장
- 1928–1930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부소장
- 1932당 제명,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체포·유배
- 1934–1936석방,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
- 1937재체포되어 사형
관련 역사 사건
데보린 학파와 소비에트 철학 논쟁
스텐은 아브람 데보린이 이끄는 이른바 '데보린 학파'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이었다. 부하린의 미망인 안나 라리나는 "이 라트비아인의 당당한 모습에는 무엇인가 장엄함이 깃들어 있었다"고 회고했으며, 동료와 적 모두 그를 학파의 핵심 이론가로 인정했다. 스텐은 1920년대 중반 기계론자들과의 논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논쟁은 소비에트 철학의 향방을 가른 분수령으로, 한쪽에는 마르크스주의 철학 자체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자연과학으로 환원하려는 이반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 등 기계론자들이, 다른 한쪽에는 철학의 독자적 영역과 헤겔 변증법의 유산을 옹호하는 데보린 학파가 섰다. 스텐은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에 대한 비판적 서평으로 이 논쟁의 포문을 열었으며, 이는 레닌과 플레하노프가 마흐주의자들과 벌였던 투쟁의 연장선에 놓인 것이었다.
스텐은 또한 루카치 죄르지, 카를 코르슈 등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상주의적 일탈'을 비판하는 논쟁에도 참여했다. 1925년 논문에서 그는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이 헤겔적 관념론으로 후퇴했으며, 이 철학적 오류는 정치에서의 '좌익 소아병'과 맞물려 있다고 공격했다. 이 비판은 코민테른의 공식 노선과 보조를 맞춘 것이었지만, 스텐 자신도 헤겔에 깊이 천착한 철학자였다는 점에서 역설을 띤다.
1920년대 후반까지 데보린 학파는 소비에트 철학계를 지배했으나, 1929년 스텐이 『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에 기고한 글은 사실상 반스탈린주의 팸플릿이었다. 분노한 스탈린은 당일로 정치국 지시문을 작성해 박해의 윤곽을 그렸다. 이어 마르크 미틴과 파벨 유딘이 이끄는 신진 철학자들이 스탈린의 비호 아래 데보린 학파를 '멘셰비키화된 관념론'으로 규정하며 공격했고, 스텐은 그 주요 표적이 되었다. 1937년 그가 처형될 무렵, 그가 집필한 『대소비에트 백과사전』의 「변증법적 유물론」 항목은 이미 인쇄까지 완료된 상태였다. 편집부는 전량 폐기 대신 서명이 적힌 한 페이지만 교체하는 방식으로 대응했고, 그 자리에는 미틴의 이름이 올랐다. 스텐의 미망인 발레리야 스텐은 전후 미틴의 표절을 폭로해 그를 『보프로시 필로소피』 편집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스텐은 방대한 두 권의 저작, 『괴테의 『파우스트』와 헤겔의 『정신현상학』』 및 『유물론적 인식론의 관점에서 본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완성했으나, 이 원고들은 그가 체포될 때 사라져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