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량원소에서 연방 정치까지: 라트비아 농화학자가 민족소비에트 의장이 되다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빌리스 라치스는 후임으로 베르클라우스를 밀었지만 모스크바는 페이베를 선택했다. 라트비아의 자율적 노선을 꺾고 임명된 그는 이후 라트비아를 떠나 모스크바의 과학행정가로 남은 생을 보냈다.
라트비아인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난 농화학자로, 식물 미량원소 연구의 선구자였다. 전후 라트비아 농업대학 총장과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거쳐 민족소비에트 의장과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을 동시에 역임하며 흐루쇼프 시기 발트 민족 간부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국면에서 베르클라우스 대신 정부 수반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모스크바로 완전히 이동하여 소련 과학아카데미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경력 연표
- 1929티미랴제프 농업대학 졸업, 전연합 아마연구소에서 연구 경력 시작
- 1940농업학 박사 학위 취득, 볼셰비키당 입당
- 1944–1950라트비아 농업대학 초대 총장
- 1951–1959라트비아 SSR 과학아카데미 원장
- 1958–1966소련 최고소비에트 민족소비에트 의장
- 1959–1962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
- 1966–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간사장, 이후 일반생물학부 학술서기
- 1969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 수여, 레닌상(1964) 등 다수 훈장
미량원소 연구와 농화학
페이베의 과학자로서의 삶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첫 시기(1929~1944)는 토르조크의 전연합 아마연구소에서 보냈으며, 아마 재배를 위한 차별화된 비료 체계의 과학적 기초를 연구했다. 그는 토양과 식물의 신속하고 정확한 농화학 분석법을 개발했고, 칼륨·알루미늄·이동성 부식질을 현장에서 측정할 수 있는 휴대용 기기를 고안해 1934년부터 소련 전역에서 양산되었다.
두 번째 시기(1944~1962)는 라트비아에서 이루어졌다. 1947년부터 이바노바, 아이주피에테와 함께 라트비아 전역 토양의 코발트·구리 함량을 정밀 조사하여 소련 최초의 미량원소 토양 지도를 작성했고, 이후 망간·붕소·아연·몰리브덴·요오드·마그네슘으로 확대했다. 이 연구를 통해 비체르노좀 지대 토양의 미량원소 공급 등급을 확립했고, 아마에는 붕소, 곡물·채소에는 구리, 콩과 작물에는 몰리브덴 비료의 높은 효과를 실증했다. 1958년에는 이동식 미량원소 측정 실험실을 개발했다. 그의 주저 『소련 비체르노좀 지대 농업에서의 미량원소』(1954)는 이 분야의 표준이 되었다.
세 번째 시기(1963~1976)는 모스크바에서 분자생물학으로 전환한 때다. 티미랴제프 식물생리학연구소에 자신이 조직한 미량원소 생화학 실험실을 이끌며, 콩과 식물의 공생적 질소고정에 관여하는 금속단백질과 효소의 분자적 메커니즘 연구로 나아갔다. 그의 마지막 연구는 공생적 질소고정을 분자에서 유기체 전체에 이르는 통합된 생리학적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농화학에서 분자생물학까지, 현장 실용에서 기초 과학까지 아우른 그의 학문 궤적은 소비에트 농업과학의 전형이자 예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