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르 야노시

Kádár János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12–1989 ○ 자연사(병사, 사인 미확정)

구야시 코뮤니즘의 설계자, 1956년 진압의 책임자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1961년)

피우메에서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이탈리아식으로 체르마니크로 등록되었고, 1927년 타자기 정비공 견습을 시작해 1929년 직인이 되었다. 1931년 불법 공산청년동맹과 당에 입당해 지하활동과 투옥을 겪었다. 1948~50년 내무장관으로서 러이크 라슬로 숙청에 관여했고, 1951년 체포되어 1952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54년 석방되었다. 1956년 10월 25일 서기장이 되어 11월 1일 소련 측으로 넘어가 진압을 수용하고 너지 임레의 처형을 승인했으며, 수백 명 처형과 수만 명 투옥이 뒤따랐다. 1961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를 제창해 대사면과 개혁을 추진했고, 1988년 사임하고 1989년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구야시 코뮤니즘: 1960년대부터의 사회·복지 타협

1956년 진압 직후의 보복이 끝나면서 1960년대 초부터 헝가리 사회의 생활 양식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사회가 근대화되고 예측 가능한 소시민적 생활 방식이 더 넓은 계층의 생계를 보장했으며, 1960~1978년 사이 식량 부족은 사라지고 실질소득 상승에 비해 식료품값이 쌌다. 소규모 자영 농지, 이른바 '마세크' 사영 부문과 퇴근 후의 '푸시' 작업, 취미 텃밭은 노동자들의 여가 노동시간을 흡수했다.

이 타협의 물질적 특징은 기본 소비재의 중앙 고정 가격, 무상 교육, 사회보험, 권리로서의 값싼 주택이었다. 병원·의원·학교·주택단지가 대량으로 지어졌고, 정치적으로 신뢰받는 이들에게는 계급 출신과 무관하게 고등교육이 열렸다. 가정의 근대화, 이른바 '냉장고 사회주의'와 자가용 보급이 진행되었고, 주로 사회주의 국가들로 향하는 관광객 수가 늘었다. 서방 언론은 헝가리를 사회주의 진영의 '가장 행복한 병영'이라 불렀다.

정치적 기원은 1956년 이후 지도부의 불안정성이었다. 혁명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생활수준을 낮추어서는 안 되며 평범한 시민이 살고 번영할 수 있게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래야 그가 근본적으로 독재적인 체제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다른 공산권 국가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생활수준이 중요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61년의 표어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가 이 노선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1961년 12월 8일 애국인민전선 대회에서 카다르는 사회주의 사회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과 민족의 번영을 보장하므로 건설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인민은 경제와 문화가 어떻게 발전하는가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헝가리어 자료는 이 표현이 라코시의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나와 함께 있는 자'에 맞서 1961년 10월 23일 이로달미 우이샤그에서 작가 메라이 티보르가 먼저 쓴 것이라고 전한다.

과거와의 단절은 1962년 라코시 마차시와 게뢰 에르뇌 및 강경파 연관 인사들의 당 축출, 1956년 혁명 관련 유죄 판결자들에 대한 1960년과 1963년의 일반 사면으로 상징되었다. 이후 1960년대 초부터 냉전의 데탕트 속에서 생활수준의 지속적 향상이 핵심 목표가 되었는데, 이는 나중에 구야시 코뮤니즘이라 불린 것으로, 나쁜 생활 조건 때문에 1956년의 사건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성과는 출처에 따라 수치가 다르지만, 러시아어 기록은 1980년대 후반 헝가리가 전자공학 등 일부 부문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을 앞섰고 유럽에서 1인당 밀·육류 생산 1위, 계란 생산 2위였으며, 소비재 시장의 부족이 훨씬 적었고 상점에 세계 각지의 값싼 상품이 채워져 있었고, 검열은 진영에서 가장 부드러웠으며 시민들은 자유로운 해외 여행권을 가졌다고 전한다. 폴란드와 함께 '가장 행복한 병영'으로 불렸고 그 경제 체제는 '구야시 코뮤니즘'으로 명명되었다.

그 이면은 감추어서는 안 된다. 복지 체제는 코메콘 지원이 마른 뒤인 1973년부터 서방 신용에 의존해 유지되었고, 국가 부채는 꾸준히 늘어 1989년까지 비밀에 부쳐졌다. 헝가리 정치인 관련 문서는 1973년과 1979년 석유 위기 이후 발전이 생산이 아니라 외화 차입으로 뒷받침되었고, 그 결과 국가 부채가 약 200억 달러로 불어났으며 GDP 대비 비중이 1973년 9.2%에서 1989년 66.5%로 상승했다고 밝힌다.

유산은 논쟁적이므로 단정하지 않고 귀속해 서술한다. 많은 헝가리인은 보복에서의 카다르의 역할을 잊고 그를 대다수 눈에 아버지 같은 '선한 왕'으로 기억하게 되었고, 이 시대는 존재론적 안정(일자리·주택·자동차·휴가)과 함께 기본적 자유의 정지를 뜻했다. 헝가리어 문서는 보복 이후의 완화에서 그의 역할이 훨씬 모순적이고 논쟁적이며, '강경한 독재에서 가장 행복한 병영으로' 이동한 것으로 평가한다고 전한다. 체제전환 이후의 향수도 귀속해 서술한다. '야생 자본주의' 아래에서 주로 저학력·육체노동 계층의 많은 이들이 안정된 생계를 잃고 노숙이 나타났기에, 많은 사람이 환멸을 느끼고 '부드러운 독재' 아래에서 물질적·존재적 안정이 보장되던 과거를 선호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중앙 계획 폐지와 기업 자율성을 다루는 신경제메커니즘(1968) 항목과 구별되는 사회·복지·문화 정책의 단계로서 함께 읽을 때 카다르 시대의 전모가 드러난다.

신경제메커니즘(1968): 동구권 최대의 경제개혁 실험

카다르 체제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1968년 1월 1일 발효된 '신경제메커니즘'이다. 녜르시 레죄(Rezső Nyers)가 실무를 주도한 이 개혁은 중앙의 의무적 계획 지표를 폐지하고 기업에 생산·가격·투자 결정권을 대폭 이양했다. 카다르는 정치국과 각료회의가 '요나단 사과부터 버스 차축까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국영기업들은 재정 자립을 얻었고 자체 지점을 열어 제품을 판매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가공업 부문에서는 상대적 가격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임금 평준화를 억제해 노동 유인을 보존했고, 1970년대 중반 포린트는 거의 완전 태환에 도달했다. 그 결과 헝가리는 1인당 밀·육류 생산 유럽 1위, 계란 생산 2위를 기록했고 소비재 부족이 거의 없는 동구권 유일의 국가가 되었다. 개혁은 1972년 브레즈네프의 압력과 1973년 석유파동으로 후퇴했으나, 그 골격은 1980년대까지 유지되어 헝가리의 체제전환을 동구권에서 가장 평화롭게 만들었다. 카다르는 서방 기자들에게 이것이 '사회주의적 시장 방법'일 뿐이라고 거듭 강조했으며, 자신의 개혁이 사회주의 틀 안에 머문다는 점을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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