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법의 언어를 시민권 투쟁으로 돌린 외교관
1968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침공을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했다.
이르지 하예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프라하의 봄 개혁과 그 좌절을 모두 경험했다. 1968년 소련 주도의 침공을 유엔에서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한 뒤 관직과 공산당 지위를 잃었고, 국제적 약속이 국내 권력보다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그는 1977년 바츨라프 하벨, 얀 파토치카와 함께 샤르타 77의 첫 대변인이 되어 헬싱키 최종의정서의 인권 조항을 시민적 책임의 근거로 제시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39–1945나치 독일에 투옥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당 의원·노동운동 간부
- 1950–1953정치·경제과학대학 총장
- 1955–1958영국 주재 대사
- 1958–1965외무차관·유엔 주재 대표
- 1965–1968교육부 장관·외무부 장관
- 1977–1979샤르타 77 첫 대변인
- 1988–1990체코슬로바키아 헬싱키위원회 창립자·의장
관련 역사 사건
전후 사회민주당 좌파에서 공산당 합병까지
하예크는 나치 수감 생활을 마치고 해방된 뒤 공산당 입당을 원했으나, 브라티슬라프 에르반과 루돌프 슬란스키의 권고로 사회민주당으로 돌아갔다. 1945~46년에는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중앙평의회 서기와 임시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고, 1946~48년에는 노동자 아카데미의 중앙서기를 맡았다. 그는 당 의장 즈데네크 피를링게르를 중심으로 한 전후 사회민주당 좌파에 속해 공산당과의 긴밀한 협력을 주창했으며, 공산당 중앙위원회와의 비밀 합의에 따라 합당 때까지 사회민주당에 남아 있었다.
1947년 11월 브르노 당대회에서 그는 중도파 보후밀 라우슈만을 당수로 선출하고 공산당으로부터의 독립을 강화하려는 노선 전환을 비판한 이른바 '16인의 성명'에 서명했다. 1948년 1월에는 사회민주당을 좌파를 통해 장악하려는 공산당의 전술에 맞추어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클럽' 결성과 기관지 《스메르》 발간에 참여했고, 이는 이 그룹에 조직적·언론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1948년 2월 정변에서 좌파가 승리한 결과 그는 반공 성향 당원들을 축출한 사회민주당 집행부의 일원이 되었고,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합당 협상에 참여했다. 합당 직후인 1948년 6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선되어 1969년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으며, 1948년부터 1954년까지 올로모우츠 지역구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다. 이 시기 그의 학술 저작들은 당대의 한계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 기록은 그를 1968년 이후의 개혁과 반정권 투쟁으로 기억하는 방식과 긴장 관계에 놓인다. 전후 사회민주당 좌파의 일원으로서 그는 1948년 권력 장악과 합당, 그리고 그에 따르는 당내 축출에 능동적으로 참여했고, 그가 당내에서 성장한 바로 그 기구가 훗날 그를 배제했다. 1968년 점령 항의로 밀려난 뒤 그는 샤르타 77의 대변인이 되어 같은 문제를 국제적 약속의 언어로 다시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