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장막 뒤에서 온 세계적 교황
“폴란드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바르샤바에서 성령에게 호소했다.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는 폴란드의 사제이자 철학자였으며,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로 선출되어 가톨릭교회를 이끌었다. 나치 점령과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겪은 경험은 인간의 존엄, 종교의 자유, 민족적 기억을 강조하는 그의 목회와 정치적 언어를 형성했다. 1979년 폴란드 방문에서 약 1,100만 명이 그를 만났고, 그의 존재는 정권 아래 흩어져 있던 사회가 자신을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도록 도왔다. 그는 연대가 결성될 조건을 만든 여러 요인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그 운동의 노동자 조직과 정치적 행위자들을 대신한 사람은 아니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46크라쿠프 대교구 사제 서품
- 1958크라쿠프 보좌주교
- 1964크라쿠프 대주교
- 1967추기경
- 1978제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1979첫 폴란드 사목 방문
- 1980연대 운동의 출범을 지켜봄
- 2005선종
관련 역사 사건
1981년 저격 사건과 그 후속
1981년 5월 13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알현을 하던 요한 바오로 2세는 튀르키예인 청년 메흐메트 알리 아자의 총을 맞았다. 아자는 극우 민족주의 조직인 회색 늑대 회원이었고, 브라우닝 9mm 권총으로 교황의 복부를 쏘아 결장과 소장을 여러 차례 관통시켰다. 교황은 게멜리 병원으로 옮겨져 5시간의 수술을 받았으며, 두 발의 총알이 위창자간막동맥과 복부 대동맥을 비껴간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체내 혈액의 사분의 삼 가까이를 잃었다. 아자는 그 자리에서 붙잡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83년 성탄절 이틀 뒤 교황은 아자가 수감된 교도소를 찾아가 약 20분 동안 단둘이 대화하였다. 교황은 그와 나눈 이야기는 둘 사이의 비밀로 남을 것이라면서, 용서한 형제로서 그를 만났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그가 재위 기간 내내 강조한 용서와 화해의 언어가 실제 행동으로 이어진 사례로 기록된다.
저격 배후에 대한 의혹은 확정되지 않았다. 소련이 연대를 지지한 교황에 대한 보복으로 사주했고 불가리아 보안기관이 이를 도왔다는 주장은 미국 중앙정보국이 당시 밀어붙였으나 증거로 입증된 바 없으며, 2006년 이탈리아의 미트로힌 위원회는 소련 군사정보가 배후라고 주장하였다. 러시아 대외정보국은 이를 부인하였고, 교황 본인은 2002년 불가리아 방문에서 당시 불가리아 지도부가 무관하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다만 비서였던 스타니스와프 지비시 추기경은 저서에서 교황이 사적으로는 소련 배후설을 믿었다고 전하였다. 사료가 확정하지 못한 이 부분은 의혹으로만 남는다.